한동안 잠잠하던 벤처업계가 다시 꿈틀거린다.
스마트폰 열풍에 힘입어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려는 벤처가 늘어나면서 제2의 벤처붐이 일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벤처라는 단어는 쉽게 언급할 수 없는 금기어였다. 벤처 CEO의 부정과 투자실패 등으로 인한 불신은 벤처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의 벤처 창업 환경은 척박하다. 10년 전 벤처 열풍이 불었을 때에는 투자 자금이 넘쳐났다. 정부 지원금도 잇따랐다. 하지만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개인투자자는 사라졌고, 벤처캐피털은 안전 지향적인 투자로 보수화되었다. 벤처 창업은 고급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대안임에도 사회적 인식은 중소기업으로 치부해버리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재들이 몰리지 않아 창업자 혼자 모든 일을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벅찰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과거 인터넷 열풍으로 들끓었던 벤처 열기가 되살아나는 조짐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벤처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 6월에만 1112개의 벤처기업이 창업했다. 조사가 시작된 1998년 이후 월별 사상 최다 기록이다. 현재 등록된 벤처기업의 수는 2만1000여개(6월 기준)로 2만개를 넘어선 것도 올해가 처음이다. 10년 전 벤처붐이 일 때에도 1만개를 조금 넘은 정도였다. 한 자릿수에 머무르던 증가율이 2009년에 22.7%로 대폭 오르더니 올해 상반기에는 13.2%나 상승했다.
벤처붐의 원동력은 스마트폰 출시로 인한 모바일 산업에서 찾을 수 있다. 이석채 KT 회장은 KT의 아이폰 출시가 벤처기업에 대해 “아이폰 출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파급 효과를 노린 것이다. 기업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벤처기업의 새로운 사업 영역이 열렸다는 뜻이다.
스마트폰 열풍을 타고 앱 개발에 나서는 1인 창업기업도 빠르게 늘고 있다. 중소기업청이 운영하는 1인 창업기업 사이트 아이디어비즈뱅크에 회원으로 가입한 1인 창업기업 수는 올 들어 6월까지 3967개에 이른다. 작년 전체 가입 기업 5425개의 70%를 웃도는 수치다.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이 1인 창업기업의 외주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바우처 지원액도 올 들어 6월까지 23억원으로 작년 전체 지원액(21억원)을 넘어섰다. 바우처 지원은 중기청이 1인 창업기업에 프로젝트를 맡기는 기업에 300만원 한도 내에서 발주액의 10%를 지원해주는 제도다. 중기청은 전국 50여개 비즈니스센터에서 1인 창업기업에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전문가 상담과 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다.
개발자의 창작공간으로 기관 및 민간기업이 구축한 앱센터에는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되기 위해 밤낮없이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서부개척시대 골드러시처럼 개발자들의 모바일 엘도라도(Eldorado)행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기획력, 실행력이 뒷받침되면 자본과 인력이 부족하더라도 능력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이른바 `앱이코노미`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주요 창업세미나에서도 스마트폰과 위치정보시스템(LBS),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빼면 창업 아이템으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과열조짐까지 보인다.
국내 모바일앱 개발자는 공식 집계되지 않지만 수만명으로 추정된다. 기업화하는 사례가 늘면서 종사자들의 출신 배경도 다양해지고 있다. 주로 IT벤처기업에서 SW개발자로 일하던 이들이 많지만 대학생 신분으로 뛰어드는 이들이나 기업에서 마케팅, 기획담당자로 활약하다 변신한 케이스도 있다.
허진호 인터넷기업협회 회장은 “주위에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10년 만에 느껴보는 활기다. 그동안 벤처기업을 차려서 성공한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사업 영역이 전혀 없었다. 인터넷 혁명에 비견되는 모바일 혁명이 벤처붐을 일으키고 있다”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정부도 청년 창업 활성화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기술·지식·IT 응용 등 이른바 대표적 창의산업에서 2012년까지 3만명의 청년 창업자를 양성하겠다는 밑그림이다.
중소기업청은 `청년 기술·지식창업 지원대책`을 마련하고 무궁한 성장 잠재력을 가진 기술·지식·IT응용 3대 창의 분야에서 청년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기술 개발 △자금 지원 △법·제도 개선 등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다. 기술 창업은 대학과 연구기관이, 지식 창업은 지자체가, IT응용 창업은 관련 기업들이 각각 담당한다. 기술 창업 활성화를 위해 대학과 연구기관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청년 예비창업자를 대상으로 창업 아이디어 발굴부터 상품화까지의 과정을 전반적으로 지원한다.
벤처업계가 강력히 요구한 기술보증기금의 연대보증 부담도 완화된다. 연대보증은 벤처업계에서 실패 후 재도전을 막는 족쇄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리스크가 크지만 지원 필요성이 있는 분야는 CEO의 연대보증 비율을 현재의 100%에서 일정비율로 낮추기로 했다.
벤처를 떠났던 투자자도 돌아왔다. 2007년 362억달러에 달했던 미국 벤처펀드 결성규모는 지난해 158억달러까지 줄어들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2007년 9626억원에서 지난해는 1조4153억원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미국이 반토막나는 동안 우리나라는 50%가량 증가한 셈이다. 지난해 벤처펀드 결성규모 1조4153억원은 벤처 붐이 절정을 이뤘던 2000년 1조4341억원 이후 최대 규모다. 2000년 이후 벤처 버블이 일시에 제거되며 2003년 6790억원까지 축소됐던 벤처펀드 결성규모는 2005년부터 서서히 규모를 키우면서 2008년 1조원대에 다시 진입했다.
김형기 한국벤처투자 사장은 “지금은 이전 벤처 붐에 이어서 10년 만에 찾아온 벤처업계에 좋은 기회”라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오히려 우리 벤처업계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벤처 1세대의 귀환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10년 전의 인터넷 혁명을 능가하는 엄청난 시장이 열린 만큼 못다 푼 한을 풀어보자며 재기에 나섰다. 전제완 프리챌 대표를 비롯해, 부도를 맞고 IT업계를 완전히 떠났던 노상범 홍익인터넷 대표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싸이월드를 SK커뮤니케이션즈에 매각했던 이동형 대표, NHN 창업자 김범수 대표까지 벤처 사업가로 돌아왔다.
<박스>벤처붐 10년만에 다시 뜰까
국내 벤처기업이 스마트폰, 소프트웨어 등 정보기술(IT)과 바이오 분야를 중심으로 최근 2만개를 돌파하면서 제2의 벤처 중흥기를 맞고 있다. 한국의 벤처업계가 2000년 IT 버블 붕괴를 딛고 다시 한 번 성공 신화를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
`벤처 르네상스`가 예고되는 건 벤처 업종과 궁합이 맞는 신기술 · 신산업이 근래 부쩍 뜬 덕분이다.
스마트폰과 3D(3차원)영상, 에너지, 의료, 녹색 바이오 등이 차세대 먹을거리로 각광받으면서 벤처 생태계가 전후방으로 조성된 것이다. 중기청의 `벤처기업 4대 업종 분포 비중` 자료를 보면 2000년에 정보기술(IT) 비중이 30%에 달했지만 지난해엔 14%로 대폭 낮아졌다. 이에 비해 28%이던 첨단 제조산업(에너지, 의료, 컴퓨터 · 반도체, 통신기기 · 방송기기) 비중은 37%로 늘었다. 벤처 토양이 그만큼 다양하고 기름져졌다는 이야기다.
10년 만의 벤처 바람이 더욱 기대되는 건 예전보다 벤처 인프라와 경영자 층이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2000년에는 투자자금 회수라든지 기술이전 · 거래 등 인프라가 미성숙한 상태였다면 지금은 벤처특별법 등을 바탕으로 인수합병(M&A)이 활발해지고 모태펀드(특정 기업이 아니라 벤처투자조합에 투자하는 펀드)라는 발달된 장치가 생겼다.
그러나 최근 국내 스마트폰 열풍이 과거 벤처 거품을 떠오르게 한다는 우려도 있다. 풍성한 애플리케이션 시대가 전개되고 있지만, 정작 소프트웨어의 라이프사이클을 제대로 거치는 기본에 취약한 우리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0년 전 벤처 열풍 당시 벤처로 포장만 하면 `묻지마 투자`가 성행하고 사업 모델도 빈약한 회사가 몇 백억 가치로 인정받았던 벤처 열풍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벤처 2.0은 건전한 생태계 조성을 통해 만들어야 한다. 벤처생태계를 이루는 요소는 정부, 모태펀드, 기관투자가, 창투사, 벤처기업 등으로 볼 수 있다. 건강한 벤처생태계의 환경의 조성은 이러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게 할때 가능해진다. 이른바 벤처생태계의 선순환구조가 이루어지게 되고 국가경쟁력이 높아진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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