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 자리에 풀 한포기 안 날 거다. 부모님 편찮으셔서 늦게 나온 친구를 지각처리하고, 급한 월말 마감인데도 기안 올려야 비용처리 해준단다. 먼 길에서 배달해온 거래처 선물을 되돌려 보내고, 오타 두 개 있다고 100페이지 매뉴얼을 다시 인쇄하란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법전 같고 태엽 감은 장난감 병정 같다. 함께 사는 가족이 걱정스럽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외골수에 원리원칙만 따지는 상사, 변화무쌍한 세상의 융통성을 좀 배우라고 누가 가르쳐주면 좋겠다.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끼어들기, 내가 하면 차선변경이다.
내가 하면 융통성인지 모르지만 남이 보기에는 스리슬쩍 원칙 없는 변덕으로 비칠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앞뒤 꽉 막힌 사람이지만 스스로의 입장에선 공평하고 일관성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내 현실과 네 현실을 다르게 인식한다. 자신의 행동은 동기부터 생각하고 타인의 행동은 현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내 시각은 균형이고 타인의 시각은 치우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앉아있는 기준에서 내 외쪽은 다 좌파고 내 오른 쪽은 다 우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는 현실이 융통성의 기준이고 이보다 더 원칙적이면 원칙주의자, 이보다 더 융통성 있으면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심리적 균형을 찾자. 균형은 원래 기우뚱거리면서 맞추다가 잡게 된다. 원칙성과 융통성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 우리는 지금 기우뚱거리는 중이다. 누가 더 균형점인지 찾아나가는 과정에선 제3자가 납득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아야 한다. 물불 안 가리고 원칙만 따져도 안 되겠지만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융통성이라는 미명하에 편법을 쓰는 것도 위험하다. 원칙을 흔들 만한 정당한 명분을 만들자. 막무가내 원성이나 신경질적 하소연이 아니라 상사의 귀를 열게 할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공익에게 보탬이 되는 명분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