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당했다. 마음 약한 나 같은 사람을 보호하는 보험이 나왔으면 좋겠다. 옆 동료는 자기가 할 일을 스리슬쩍 맡기고 가고, 옛 동창은 필요도 없는 상품을 은근슬쩍 안기고 간다. 어찌나 불쌍하게 하소연을 하는지 손을 덥석 잡을 뻔했고, 어찌나 다정하게 칭찬하는지 품에 안겨 울 뻔했다. 그렇게 혼미해진 틈을 타서 내 책상이 수북해졌다. 관계가 악화될까봐 번복할 수도 없고 기대를 저버릴까봐 착한 모습을 못 버리겠는 나, 사람들에겐 가장 좋은 먹잇감인데 스스로에겐 책상에 머리만 쥐어박는다
타고난 스타일은 쉽게 안 바뀐다.
세상에 보시한다 여기고 이용당한 게 아니라 도와준거라고 여기자. 어쩌면 나 같은 스타일은 수락하고 찜찜한 마음보다 거절해놓고 미안해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으면 뒤돌아보지 말자. 앞에선 착하게 생색내고 뒤에선 속 좁게 짜증내는 이중적인 태도가 더 나쁘다. 다만 조직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해주면 우리 부서도 해줘야 하고, 이번에 해주면 다음에도 해줘야 한다. 명확하게 선을 긋고 도와주더라도 생색내며 도와주자. 사실 경계선 없이 모호하게 일을 떠맡는 경우는 회사 방침이나 규모 탓도 있겠지만 내 개념 없는 오지랖 때문이기도 하다. 혹시 상대의 교활한 말발 때문에 당한 게 아니라 우선순위 없는 내 업무 계획 때문에 당한 것은 아닐까. 누가 뭐래도 우선순위는 내 업무다. 지금 마땅히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보니 상대의 말에 넘어가고 홀리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하고 할 일이 명확한 사람은 그렇게 스리슬쩍 넘어가지 않는다. 내가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이 부탁은 언제까지 무엇만큼만 도와줄 수 있다고 명확하게 합의한다. 길을 잃었을 때 여우한테 홀리는 법이다. 마음 약한 사람은 `강도 높은 계획`이라는 보험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홀리지 않고 정신 차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