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이 원나라 소주, 항주 출신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기녀였다. 그래서 조선 노비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엔지니어이자 과학자인 장영실(1390~1450)은 노비였다. 호기심이 많았고 무엇인가 연구하는 재주를 가진 청년일 뿐이었다.
그를 다시 돌아본다. 인생의 시작이 임금 세종이었고 그 끝도 세종이었다. 일곱 살 차이였다.
스물 두 살에 즉위한 세종은 동래관헌에서 일하던 노비 장영실을 국비 유학생으로 발탁, 유학을 보낸다. 노비를 발탁해 중국으로 유학을 보낸다는 것은 유교사회에서 상상조차 어려운 파격이었다. 하지만 유쾌했다. 이 한 번의 선택으로 세종이 조선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대통령이 되었으니까.
서른 하나의 나이에 중국 유학길에 오른 장영실은 2년 뒤 귀국, 세종을 가장 ‘실용적’인 임금으로 만들었다. 장영실은 1423년(세종 5년) 천문기기를 만들고 공을 인정받아 관노 신분에서 해방된다. 이어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자리에 오른다. 궁중에서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자리였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직속 정부출연연 책임연구원쯤 될까. 기상청, 천문연구원, 농업기술연구원, 표준과학연구원의 국가과학기술자가 그의 직함이었다. 집착은 무서웠다. 간의대, 천문의 혼천의, 활자주조, 자격루, 앙부일구 등 농업과 관련된 다양한 발명품을 쏟아낸다. 만드는 것마다 실생활에 적용 가능한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실적만을 따지더라도 S급 인재였다. 그는 정3품에 오른다.
퇴장도 파격적이었다. 세종이 휴양지로 가는 길에 탄 수레가 부서져 곤장을 흠씬 맞고 파직당한다. 부서진 수레가 그가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노비는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자 엔지니어인 ‘프로’로 자리매김하곤 그렇게 사라졌다.
국과위가 논란이다.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더니 이제는 법률상 어려워 장관급 위원장을 둔단다. 그 대신 청와대 기획관이 참여해 대통령 의중을 전달하겠다고 한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틈만 나면 강조하던 여야 의원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대한 역사적 발명은 파격을 동반한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과학 대통령이 되려면 그 과정에도 파격이 필요하다. 파격을 겁내면 ‘위대한 과학’은 없다.
이민화 중소기업호민관이 총리실에 사표를 냈다. 중소기업 상생, 벤처기업인 재활 프로그램을 강조하던 그였다. 그 역시 실패한 벤처기업인으로 ‘주홍글씨’ 낙인이 찍혔던 기업인이었다. 하지만 업계는 실패한 기업인이어서 더 기대했다.
MB 정부가 그의 실패한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고 해서 더욱 유쾌한 파격을 기대했다. 그가 외치는 상생은 다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사표를 썼다.
스스로 쓴 사표지만 각종 규제 장벽이 있는 한 그것은 장영실의 ‘파직’이다.
김상용 취재총괄부국장sr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