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스티브 잡스는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컴퓨터를 만들었다. 당시 청바지에 덥수룩한 긴 머리를 한 그들은 단정함을 거부한 1960년대 히피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그들의 외모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다. 투자할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를 가졌는지에만 집중했다. 실리콘밸리는 유별난 괴짜들을 거부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옆 동네인 할리우드도 과거에는 장기 계약을 한 배우와 영화 제작자들을 고용한 대규모 스튜디오가 주류를 이뤘다. 당시만 해도 영화는 휴대폰 생산공장과 비슷한 조립라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지고 실리콘밸리처럼 역동적인 제작 메커니즘으로 돌아간다. 한 제작자가 각본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투자자들을 끌어 모은다. 그리고 투자 유치에 성공하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배우와 기술자 그리고 스태프들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을 꾸린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수십년간의 활동으로 영화가 완성되면 팀은 해산하고, 그 일원은 또 다른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새로운 프로젝트팀을 구성한다.
새로운 산업, 특히 첨단 비즈니스 분야는 이런 할리우드의 모습을 닮아간다. 창의적인 ‘제작자(기업가)’가 ‘아이디어(사업계획)’를 내면 유능한 기술자와 투자자들이 모여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한다. 대학을 중퇴하고도 차고에서 열심히 일해 성공하는 사람과 기업이 등장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메커니즘 덕분이다. 차고 출신 기업가 중 상당수는 파산하지만 일부는 애플이나 구글처럼 계속 성장해 또 하나의 커다란 숲을 이룬다. 이것이 실리콘밸리의 기업문화이자 성장 인프라다.
글로벌 여론조사기업인 갤럽이 최근 전 세계 36개국 2만616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창업 선호도는 51%로 유럽 27개국 평균(45%)보다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창업가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갖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한국이 30%로 미국(73%), EU(49%), 중국(40%), 일본(32%) 등과 비교해 가장 낮다. 또 ‘5년 이내에 창업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답한 응답자도 한국(23%)은 EU(28%)보다 낮은 최저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 창업은 도박에 가까운 모험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서로 맞물려 살아가는 자연 생태계처럼 경제도 사회 인프라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조그만 벌레와 이끼가 있어야 숲을 이룰 수 있듯, 새로운 아이디어로 도전하는 기업이 나와야 역동적인 시장이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규모가 크고 오래된 회사라고 해서 한물간다거나 밀려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유니버설, 디즈니가 없는 할리우드는 상상하기 어렵다. 스탠퍼드대학과 마이크로소프트, IBM, 시스코 등 거대기업은 실리콘밸리 발전을 이끄는 소중한 인프라다. 새로 시작한 조그만 회사와 오래된 큰 회사 그리고 정부, 연구소, 대학, 투자회사가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고 함께 도전하는 것이 역동적인 스타트업(Start-Up) 경제의 미래상이다.
주상돈 경제과학담당 부국장 sdj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