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에는 정년이 없다. 남들은 은퇴를 생각할 만 55세에 삼성전자·하이닉스·매그나칩 등 쟁쟁한 반도체기업의 임원 생활을 청산하고 반도체 설계(팹리스) 벤처기업을 창업, 3년만에 매출 500억원 규모 회사로 키워낸 인물이 있다.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사장(58)은 TI·맥심·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다국적 반도체 기업이 주로 장악하던 전력관리용 반도체(PMIC) 분야에 뛰어들어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아날로그 반도체 기반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PMIC를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 건 무모한 도전(?)으로 치부됐다.
허 사장은 13일 “벤처를 하겠다고 하니 안 될 거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지난 1976년 삼성전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디지털 논리회로를 이용한 전자제품, 미니컴퓨터 개발이 주 업무였다. 1979년, 미국의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ion)’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스탠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난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가 다시 삼성전자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건 1989년이다. 삼성전자 임원으로 재직하면서 ‘RISC(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 중앙처리장치(CPU)’ 개발을 지휘했다.
허 사장이 본격적으로 반도체에 주력하기 시작한 건 하이닉스로 옮기면서다. 지난 2004년 하이닉스의 시스템반도체사업부가 분사하면서 매그나칩 사장이 됐다. 지난 2006년에는 매그나칩의 VGA해상도 CMOS이미지센서(CIS) 시장 점유율이 전 세계 25%를 넘을 정도로 특정 제품에서는 경쟁력을 갖췄다.
2년 만에 퇴임해야 했던 그는 “반도체는 3년 이상 시간을 두고 공들여야 하는 사업”이라며 “대주주인 사모펀드와 의견차가 있어 투자는 물론이고 후속 제품 준비를 할 수 없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리고는 오랜 대기업 생활을 접었다. 그는 지난 아쉬움을 이제 벤처기업에서 보상받고 있다. 실리콘마이터스 설립을 위해 페어차일드 출신 이준 상무와 의기투합하고 거의 6개월을 인재 영입만을 위해 뛰었다. 그동안 한국에 없던 제품, 솔루션화가 가능한 제품, 시스템온칩(SoC)에 집적되지 않을 기술로 사업화 방향을 잡았다. 인원이 6명이 됐을 때 회사를 창업했다.
전자제품·MCU·설계자동화툴 개발 경험에 기업 경영까지 두루 거친 만큼 자신의 노하우를 적극 활용했다. 허 사장은 “몇 천명의 인원과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대기업과 차별화할 수 있는 건 직원 하나하나를 주류로 만들고, 사람 중심의 회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중소기업 경영 비결을 설명했다. 개발자들에게 자율권을 주고 성취감을 주니까 스스로 신이 나서 일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이미 직원 수가 80명으로 불어났지만 이 회사가 생긴 이래 그만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유연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 아직 사훈(社訓)조차 정하지 않았다.
허 사장은 “벤처기업을 하겠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나이도, 대기업 사장 출신이라는 것도 아무 문제가 안 된다”며 “벌써 인수 제안을 4번이나 받았지만 우리 직원들과 갈 데까지 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정년은 생각 안 해봤다”며 “일단 실리콘마이터스를 10억달러짜리 회사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kr
오은지기자 onz@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