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대 말 마쓰시타에서 영상·오디오 분야 전문기업으로 분사한 JVC는 그 당시 영상가전의 최고업체인 소니에 VCR 공동 개발을 제의했다. 소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데 왜 너희랑 공동 개발을 하느냐는 식이었을 듯싶다. 이후 소니는 ‘베타맥스’라는 VCR 기술을 발표했고 JVC는 VHS라는 기술을 개발해 각기 프로모션에 나서면서 표준경쟁이 시작됐다. 소니는 기술이 월등한 만큼 알아서 선택하라는 입장이었다.
성능상으로는 베타맥스가 우월했다. 테이프 크기, 녹화품질 대부분의 항목에서 베타맥스가 앞섰다. 일부 기업이 제의한 OEM 요청도 거절했다. 그만큼 자기 기술에 자신이 있었다. JVC는 접근이 달랐다. 주요 가전업체들을 방문해 일일이 자사 기술을 설명하고 공동 사업을 제의했다. 일부 기업들의 OEM 제의도 수용했다. 1980년대 중반 결국 VCR 표준전쟁은 우군 확보에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JVC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소니의 명성을 듣고 베타맥스 방식의 VCR를 구매한 소비자들은 하소연을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영화 비디오가 제공되지 않아 가끔 TV를 녹화해 보는 용도로만 사용해야 했다. 그 당시 겨우 컬러TV를 생산하기 시작한 국내 전자업체들은 이러한 표준전쟁에서 소외됐다. 우리 기업들은 사실상 소니와 JVC의 포섭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국내 기업들이 3DTV 패널표준을 놓고 주역으로 맞붙고 있다. 삼성전자가 올해 초 셔터글라스 방식이라는 기술을 들고 3DTV 시장을 개척하자 LG디스플레이는 최근 필름패턴/편광안경방식(FRP) 기술을 내세워 새로운 3DTV 패널 표준을 제시했다. 셔터글라스 방식은 해상도도 높지만 화면 깜박거림, 겹침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LG디스플레이가 내세운 FRP 기술은 셔터글라스의 난제를 극복했지만 해상도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문제가 남아 있다.
주목할 대목은 LG디스플레이 행사에 적지 않은 TV업체들이 함께 참여했다는 점이다. 마치 JVC가 경쟁사를 규합했듯이 스카이워스·콩카·하이센스·하이얼·창홍·TCL 등 중국 6대 LCD TV 업체들은 물론이고 LG전자·비지오·도시바·필립스 등 글로벌 LCD TV 업체들의 최고 경영층이 대거 참석했다.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은 “중국 6대 TV업체들이 다 모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며 “중국 유통 라이벌인 궈메이·순이 등도 함께 참석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든든한 벽은 세계 TV 1, 3위 기업인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와 소니다. 조인트벤처로 엮인 두 회사의 무게감은 중국기업과 다르다. 최초의 3D 패널을 양산한 선발기업으로서의 이점도 무시할 수 없다. 3D 패널 표준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누가 더 많은 LCD 업체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지다. AUO·CMI·샤프 등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치명타를 입기도, 아니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30년 전 우리는 전 세계 표준전쟁에서 철저히 소외됐지만 이제는 표준전쟁을 주도하는 국가, 기업으로 부상했다. 많은 표준화 역사에서 승부는 결국 누가 더 영향력 있는 기업을, 더 많은 우군을 끌어들이는지에 따라 결정됐다. 우군 확보는 양보와 타협, 그리고 신뢰가 근간이다.
유형준 반도체디스플레이팀장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