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케이블, 위성, IPTV, DMB 등 여러 방송매체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는 국내 방송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다. 방송 관련 장비 및 솔루션 업체들은 이 좁은 국내 시장만을 놓고 경쟁해서는 발전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근 국내 케이블방송 수신제한시스템(CAS) 표준화 과정을 보면 시대를 역행하는 것 같아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명색이 한 나라의 표준이라고 하면 그 진행되는 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오직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표준을 이용한다면 장기적으로는 국내 기업과 시장 모두 세계적인 흐름에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디지털 위성방송 성공사례에 비추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2000년 국제방송음향조명기기 전시회(KOBA)에서 수신제한시스템(CAS) 기술 세미나가 열렸다.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CAS 업체들이 모두 참여해 기술과 솔루션을 선보였다. 당시 국내에도 디지털 위성방송 제한수신 정합표준이 있었지만 이 표준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기술을 수용해 표준 자체가 국내시장의 진입장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 시장의 여러 방송사에서 다양한 사업경험을 지닌 CAS 업체들은 자사의 최신 기술과 솔루션을 아무런 제약 없이 제안했다. 그 결과 새로운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자는 전 세계적으로 검증된 솔루션을 선택하고 도입, 짧은 기간 안에 준비를 마치고 2002년부터 상용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과거 방송 표준 실패 사례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996년 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디지털TV 공개 표준인 디지털비디오방송(DVB)을 기반으로 정합표준을 만들 예정이었지만 DVB 표준이 확정되지 않고 표준 완료 목표 시점이 다가오자 목표 날짜만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한국 독자 표준을 만들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DVB 표준이 확정됐고 우리는 4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결국 DVB 표준으로 재개정한 바 있다.
2000년 위성방송에 대한 데이터방송 표준화 작업도 마찬가지다. DVB 표준 제정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데이터방송 표준에서는 표준을 위한 표준이 아닌 세계 시장의 흐름에 맞고 방송사업자가 원활한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표준을 기대했다. 그러나 세계에서 이미 검증받은 유수의 기술은 배제된 채 국내 기술 위주로 표준이 만들어졌다. 국내 솔루션 업체들의 적극적 지지로 채택된 국내 표준은 시장에서의 경험이 없던 탓에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은 끝에 상용화됐다.
갈라파고스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들만의 표준만 고집함으로써 세계시장에서 고립되는 현상을 말한다. 1990년대 이후 일본 IT산업이 자국 시장에만 안주한 결과 경쟁력이 약화돼 세계시장에서 고립된 상황을 설명하며 등장한 용어다. 휴대폰 시장을 보더라도 치열한 글로벌 경쟁을 통해 기술력과 면역력을 확보한 국내 업체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 업체들은 자국 내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경쟁력은 적극적이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앞선 기술과 경험을 배우고 세계 기술 흐름에 부합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환경과 표준을 갖춰야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 살아남을 수 있다. 한국에서의 최강자가 세계 시장에서는 군소업체가 되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접근 방식을 버리고, 방송시장에서도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길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할 때다.
강병국 엔브릿지테크 대표, bkk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