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라이트 퀄컴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사업 담당 이사는 기자를 만나는 자리에 휴대폰과 종이 몇 장만 달랑 들고 나왔다. 퀄컴의 신기술을 선보이는 자리에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A4 용지 몇 장이라니, 의아해 하는 기자에게 그가 말했다. “이 종이 위에 휴대폰을 갖다 대면 화면을 봐주세요.”
화면에서 사각의 링이 떠올랐다. 로봇 두 개가 링 안에 있다. 화면 아래쪽에 떠오른 방향키를 눌렀더니 로봇 하나가 움직이면서 둘의 권투 시합이 시작됐다. 라이트 이사는 “퀄컴의 증강현실 기술을 응용한 제품은 올해 상반기에 상용화된다”고 말했다. 그가 직접 시연한 게임은 지난 1990년대에 완구회사 메텔이 만들어 유행했던 ‘Rock`em Sock`em Robots’라는 게임을 화면 위에 구현한 것으로, 올해 상반기 출시된다. 증강현실을 지원하는 퀄컴 칩세트가 내장된 휴대폰에 게임앱(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고, 일정한 패턴이 그려진 종이 한 장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드디어 증강현실 시대가 열렸다. 장소를 카메라로 찍으면 지도가 나타나고 사물을 스캔하면 제품 정보가 나오는 세상이 왔다. 퀄컴은 증강현실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퀄컴의 증강현실 기술을 ‘비전 기반’이라고 설명했다. 카메라 센서를 통해 이미지를 읽어들이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기존의 이미지들과 비교해서 그 이미지를 계산해내고, 일정한 정보를 화면에 띄워준다. 퀄컴의 스냅드래곤에서는 이 프로세스가 1초에 30번 일어난다. 사용자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과 거의 동시에 휴대폰 화면에서 증강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라이트 이사는 ‘너드(nerd)’라는 게임도 함께 보여줬다. 화면 속의 ‘공부만 아는 얼간이(nerd)’ 캐릭터들의 행동을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또 잡지에 있는 모델 사진을 비추면 모델을 360도로 볼 수 있고, 줌인 기능을 이용하면 옷의 세세한 바느질까지 확인할 수 있는 앱,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교과서, 전자제품에 갖다 대면 사용법이 나타나는 앱 등 다양한 기술들도 선보였다. 그는 “증강현실 시대가 오면 지금의 QR코드를 한 차원 뛰어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라이트 이사는 “지금은 증강현실을 즐기기 위해 각각 기능을 가진 앱이 따로 필요하지만 향후에는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통합 앱도 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게 방대하게 축적된 데이터와 비교를 통해 가능하다. 퀄컴은 지난 몇 년간 증강현실 기술을 준비하며 데이터를 축적해왔다. 서울과 비엔나에 연구개발(R&D) 센터를 두고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공과대학에 게임 디자인 스튜디오를, 샌디에이고 본사에 상용화 사업팀을 설치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간편하게 증강현실 앱을 만들 수 있게 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개발툴 키트(SDK)를 공짜로 제공하고 있다. 모든 운용체계(OS)를 지원해서 안드로이드·윈도7·iOS 등 모든 앱스토어에 앱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10월부터 25개국에서 1000명 이상의 지원자를 받아 ‘퀄컴 증강현실 개발자 챌린지’도 진행하고 있다. 오는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월드모바일콩그레스(MWC)’에서 수상자를 발표한다. 라이트 이사는 “이런 노력들 덕분에 이미 퀄컴은 상당한 양의 DB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반도체 회사가 증강현실 기술을 개발해 공짜로 배포하는 이유가 뭘까. 라이트 이사는 “퀄컴은 소프트웨어 회사가 될 생각은 없다”며 “지금까지 모뎀과 멀티미디어 프로세서를 통합하고, 그래픽 프로세서를 통합해온 것처럼 칩에서 차별점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퀄컴의 이런 실험이 어떤 혁신적인 반도체를 탄생시킬지 기대해 볼만하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