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방시대]포스텍 블록공중합체자기조립연구단

원하는 시기에 특정 용량의 약물을 투여하는 맥동형 방식의 약물전달체 그림.
원하는 시기에 특정 용량의 약물을 투여하는 맥동형 방식의 약물전달체 그림.

 엄지손톱만 한 필름에 영화 1250편을 저장하는 정보소자, 한 번 투여하면 두 달간 투약할 필요가 없는 신개념 약물전달체.

 고분자조합체와 블록공중합체라는 분자화합물의 연구를 통해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는 미래의 생활상이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의 세계에는 재미있는 현상이 많다. 특히 조건만 갖추면 스스로 모양을 만드는 고분자조합체와 블록공중합체는 세상을 바꿀 새로운 연구 분야로 주목받고 있다.

 블록공중합체라는 분야가 우리나라 학계에 도입된 것은 불과 20여년 전. 포스텍(포항공대 POSTECH) 블록공중합체 자기조립연구단(단장 김진곤·이하 연구단)은 국내 학계와 산업계에 블록공중합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첨단 원천기술을 끊임없이 발표한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의료산업의 혁신을 이끌 약물전달체=지난해 7월 연구단은 의료 분야를 뒤흔들 기술을 개발했다. 그동안 정보저장매체나 연료전지에 활용될 것으로 생각했던 블록공중합체 기술을 응용해 장기간 투약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개념의 약물전달체를 개발했다.

 당시 개발한 약물전달체는 단 한 번 몸에 투여하면 모래시계처럼 두 달간 약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게 해주는 서방형 단백질 약물전달체다. 세계적인 다국적 제약회사인 독일의 ‘호프만 라로셰(Hoffman-La Roche)’가 우수논문연구상을 줄 정도로 산업적 가치를 인정받은 기술이다.

 블록공중합체로 만들어진 나노기공막 속 ‘나노채널(Nano Channel)’을 약물의 1.7배 정도 크기로 조절해 한 번에 딱 한 개의 단백질 입자만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이 전달체는 저장부에 있는 약물의 양에 관계없이 일정한 속도로 체내에 방출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매일 성장 호르몬을 투여해야 하는 왜소증 환자나 암치료 등 매일 병원을 방문해 약을 투약해야하는 환자들에게는 엄청난 희소식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여러 번 투약할 약물을 한 번 투약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약물의 방출을 자연스럽게 유도함으로써 약물의 변성을 막고 면역반응 등의 부작용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리모컨으로 조절하는 약물전달장치 개발=연구단은 기존 연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지난달에는 몸 밖에서 리모컨으로 약물 투약 여부를 조절할 수 있는 약물전달장치도 개발했다. 이번엔 전기자극을 이용해 나노기공을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원하는 시기에 특정 용량의 약물을 투여하는 맥동형 방식으로 특히 호르몬 치료에 기대를 걸고 있다. 호르몬 치료는 최근 급증하고 있는 불임이나 감상선병, 당뇨, 골다공증과 같은 질병은 물론, 불면증과 편두통 등 현대인들에게 많은 질병 치료에 유효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 자극을 주면 모양이 변하는 ‘플리피롤’을 나노기공막에 붙여 전기자극에 따라 기공이 열리고 닫히도록 하는 원리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인공심장의 전압(약 3V)보다 낮은 1V 이내의 전압으로 구동이 되기 때문에 인체에도 안전하다. 무엇보다 마이크로칩이나 센서를 결합, 약물 투여에 따른 몸의 반응을 감지하고, 체외에서 리모컨을 이용해 조절할 수 있다.

 ◇꿈의 소자 상용화 눈앞=블록공중합체는 역시 초고집적 정보소자의 핵심기술이다. 연구단은 지난해 5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 공동으로 20nm 크기에도 강유전체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는 초고집적 강유전 나노소자를 개발해냈다.

 전기장이 없는 상태에서도 전기적 분극을 유지하는 물질인 강유전체는 최근 전원을 꺼도 정보를 잃지 않는 정보저장 소자나 한 번 충전으로 하루종일 쓸 수 있는 노트북 전지 개발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기술로는 강유전체 나노구조가 60nm 이하로 작아지면 고집적화가 어려워 상용화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연구단은 블록공중합체가 형성된 나노구조에 강유전체를 포집시켜 강유전성을 지난 가장 작은 크기의 나노입자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이 구조에서 틀로 사용한 블록공중합체를 없애도 강유전성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김 교수와 연구단은 ‘폴리스티렌-폴리펜틸 메타아크릴레이트 블록공중합체’를 사용해 고분자 및 고분자 복잡계에서 ‘닫힌 루프형 상거동’을 가진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지난 2002년 10월에 네이처 머티리얼즈지에 게재)했다. 연구단은 이 같은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압력가소성을 이용해 상온에서 구동하는 테라급 정보저장소재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 연구성과는 2009년 11월 ‘네이처 테크놀로지’의 표지논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연구단은 이 밖에 최근에는 블록공중합체를 이용한 새로운 개념의 DNA팁을 개발해 블록공중합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포항=정재훈기자 jhoon@etnews.co.kr

장기간 약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게 해주는 서방형 단백질 약물전달체.
장기간 약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게 해주는 서방형 단백질 약물전달체.
지난 2009년에 개발된 압력가소성을 이용해 상온에서 구동하는 테라급 정보저장소재 그림.
지난 2009년에 개발된 압력가소성을 이용해 상온에서 구동하는 테라급 정보저장소재 그림.
김진곤 블록공중합체 자기조립연구단장이 학생과 함께 실험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진곤 블록공중합체 자기조립연구단장이 학생과 함께 실험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