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인간이 만드는 ‘인공물’은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됐다. 느린 걸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동차가 만들어졌고, 시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안경이 개발됐다. 이때 디자인은 제품이 최대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20여년 사이에 기술 개발의 패러다임이 두뇌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디자인도 달라졌다. 사람 대신 기억하고 판단해 주는 기술이 시대를 이끌게 되면서 디자인도 사용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말하자면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UI Design)’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기업들은 앞을 다퉈가며 UI 관련 조직을 만들었고, 디자이너들은 사용 편의성을 높이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최근 디자인은 또다시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다. 이른바 ‘사용자 경험’이라고 하는 UX(User-experience) 디자인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지금은 UX 디자인이 사업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애플·스타벅스·구글 등이 보여준 것처럼 UX 디자인은 산업의 구도를 바꿀 정도의 파괴력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UX 디자인을 선점하는 기업이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떠오르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UX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기기(Device)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젠가 나는 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다가 어느 참가자와 명함을 교환한 적이 있는데, 그의 명함 모서리에는 그의 웹사이트를 방문할 수 있는 비밀번호가 담겨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 번호로 그의 웹사이트를 방문했을 때 거기에는 나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와 사진 등이 올라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명함이라는 것을 단순히 글자 모양이나 컬러로 디자인하기보다 사람과의 인연이라는 경험을 디자인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면 비단 명함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정보와 엔터테인먼트를 원하는 것이지 TV를 원하는 게 아니다. 이 때문에 TV를 고집하다 엔터테인먼트를 놓치면 결국 TV사업이 무너진다. 냉장고·휴대폰을 보지 말고 사용자가 궁극적으로 충족하고자 하는 경험 행위를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둘째, 융합(Convergence)해야 한다. 고객이 느끼는 경험은 단지 하나의 요소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기기는 물론이고 콘텐츠·서비스·네트워크 등이 맞물려 있는 것이다. UX 디자인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이를 융합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팟이 성공한 것도 단지 제품의 UI나 외관 때문이 아니라 아이튠스, 음원 판매와 같은 또 다른 영역과 융합했기 때문이다.
셋째, 효용성 중심의 디자인이 아니라 고객의 오감을 만족하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제품에는 일반적인 품질 말고도 이른바 감성품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재미가 있는, 기분 좋게 열리고 닫히는, 그리고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등의 품질이다.
한때 손목시계는 얼마나 얇고 정확한지에 따라 품질이 평가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당한 무게감과 약간의 오차가 있는 시침, 분침의 여유, 그리고 적당히 뻑뻑하게 감기는 태엽 등 오히려 ‘덜 효용적인’ 시계가 더 고가에 팔리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UX 디자인 능력은 기업의 핵심 경쟁력인 동시에 미래 성장동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중요해졌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참고해 UX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서둘러야 할 때다. 서둘러야 한다고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디자인의 트렌드여서가 아니라 고객의 잠재된 요구에서부터 발현된 고객가치기 때문이다.
이건표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 kunpyo.lee@lg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