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인, 흑인, 모슬렘, 노숙자, 남 간호사, 동성애자, 싱글 맘. 모두 책 제목이다. 그 흔한 수식어도 없다. 오직 단어만으로 특정 직업이나 인종, 종교, 성격 등 내포한 의미를 규정한다. 만약 단어를 접하는 것만으로 적잖은 거리감을 느꼈다면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평소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언제 어디서나 이 책들을 구할 수는 없다. 내달 11일부터 13일까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을 찾은 사람에게만 대출이 허용된다. 이 책들은 모두 종이가 아닌 ‘사람’인 탓이다. 일명 ‘휴먼 라이브러리(Human Library)’라는 특별한 행사가 이 특별한 책들을 한데 모았다.
지난 15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내 한 강의실에는 열 명 남짓한 학생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었다. “남자 패션모델은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편견을 갖고 있잖아.” “그건 좀 억지스러운데. 차라리 예술가를 섭외해보자. 다들 까다롭다고 느끼지 않아?”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KUSPA라는 동아리 소속 학생들. 대학생에게 다양한 문화를 제공한다는 목표로 문학제, 음악제, 영화제 등을 기획했던 이들이 이번에는 휴먼 라이브러리라는 아이템을 들고 나왔다.
“휴먼 라이브러리는 덴마크에서 처음 시작했어요. 기본 형식은 사람이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라는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예를 들어보죠. 대여 신청을 하면 최대 45분 동안 책과 독자가 대화를 나눌 수 있지요. 책 한 권을 여러 명이 읽는 일도 가능하고요.”
행사를 준비하는 오하연(23)씨는 휴먼 라이브러리가 대화를 통해 편견과 고정관념을 깰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책 섭외가 쉽지는 않았을 터. 이들은 각종 단체를 찾아가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를 통해 책이 되어 줄 이를 수배했다. “싱글 맘이나 혼혈인은 노출을 꺼리고, 시인이나 환경운동가는 ‘우리가 왜 편견을 불러 일으키느냐’며 핀잔을 듣기도 했어요. 학생이다 보니 섭외 비용을 지급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고요. 물론 책이 되겠다고 직접 찾아온 이들도 있지요.”
이들은 휴먼 라이브러리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사회 각 영역에서 창조적 사고가 중요해지는 이때,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장벽을 뛰어넘는다면 훨씬 창조적인 생각이 발휘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동아리 회장인 유용재(21)씨는 “인권운동이 활발한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휴먼 라이브러리가 활성화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굳이 이런 행사를 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다”며 “작은 곳에서부터 인식을 바꿔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창규기자 k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