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현장감(現場感)

 옛날에는 문인들이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잔을 띄워 순번대로 마시며 시를 읊는 놀이를 많이 즐겼다. 경주에 있는 포석정(鮑石亭)은 이런 놀이를 했던 터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시선(詩仙)이자 주성(酒聖)으로 통하는 이백(李白)은 황제와 함께한 연회에서 자신의 순번이 돌아오자 배포 좋게 금잔을 망치로 두드려 크게 만든 뒤 술을 청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 최고의 명필(名筆)로 알려진 왕희지(王羲之)도 명사들과 함께 이런 유흥을 자주 즐겼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난정서(蘭亭序)’는 바로 이런 놀이를 하며 지은 시를 모은 시집의 서문이다. 어찌나 명작이었던지 당태종이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고 한다. 지금 전해오는 서첩은 모두 당태종이 글씨 좀 쓴다는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임서(臨書)해 보라고 해서 남겨진 필사본이다.

 그런데, ‘난정서’는 사실 왕희지가 술에 잔뜩 취해 비몽사몽간에 쓴 글이었다. 다음날 아침 잠을 깬 왕희지 자신조차 크게 감동을 받아 몇 번이고 다시 써 보았지만 전날 밤에 쓴 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다. 해서·행서·초서 등 3개 서체를 완성시켜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書聖’으로 꼽히는 왕희지였지만 술이 깨고 난 뒤에는 그날의 ‘현장감(現場感)’을 그대로 되살려 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정부부처와 산하기관의 지방이전이 연이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중앙에 집중돼 있던 권한을 지방으로 이전해 주는 차원이다보니 지자체간 유치전도 치열하다. 그럼에도 정작 지역 과기인들은 지자체는 세수가 계속 줄어드는 반면 중앙정부는 지자체에 부담이 되는 매칭사업만 늘리고 있어 운신의 폭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소연이다.

 지난 12일 경기도에 모인 지역혁신 전문가들도 ‘지방과학기술정책 추진에 있어 중앙정부와 지역의 역할분담 방안’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지방과학기술정책 추진의 패러다임을 중앙정부 주도에서 지방자치단체 주도로 바꿔달라고 입을 모았다. 지역특성에 맞게 자체적으로 현장감 있는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국토균형발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번쯤 귀기울여 들어야 할 목소리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