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 규모는 2300억달러(약 250조원). 이 중 한국 시스템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5%도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60조원이 넘는 팹리스 시장에서도 한국의 위치는 보잘것없다. 국내 최대 팹리스 규모가 고작 세계 51위인 현실은 초라하기만 하다.
한국 세트산업은 발전했지만, 시스템반도체 산업은 그만큼의 성장을 거두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기능이 복잡해질수록 시스템반도체의 발전이 없이는 세트산업의 성장도 요원하다. 최근 세트 기업들이 자체 시스템반도체 기술력을 키우거나 국산화에 투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그뿐만 아니라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분야에 씨앗을 뿌리고 있는 팹리스도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물론, 그동안 팹리스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지나치게 한 제품에 의존하기도 했고, 작은 시장에서 이전투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 대표 IT산업인 휴대폰·LCD·디지털TV 등의 분야에서 핵심 기술력을 다져오며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매출 10억달러를 목표로 뛰고 있는 한국 IT산업 경쟁력의 근간인 시스템반도체 팹리스를 소개한다.
◇모바일·디스플레이와 동반 성장=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분야에서는 텔레칩스(대표 서민호)가 안드로이드용 제품을 개발해,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텔레칩스는 지난 2009년부터 중국 시장에 안드로이드 기반의 스마트패드용 AP 솔루션을 공급해왔다. 현재 120여개, 180여종에 채택돼 양산하고 있다. 중국에서 제조하는 스마트패드가 대중화되지 않아 매출이 아직 크지는 않지만, 저가 스마트패드가 확산될 경우 고속 성장을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수백개의 중국 제조 업체들이 앞다퉈 스마트패드를 개발하고 있는 만큼 스마트패드 대중화와 함께 저가 스마트패드 시장도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엠텍비젼(대표 이성민)도 AP 개발 마무리 단계다. 국내 한 대기업과 공동으로 개발한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는 오는 3분기 출시될 예정이다. 이 AP는 1㎓로 중저가 스마트폰을 겨냥해 개발한 것이다. 국내 시장은 물론이고 중국 영업도 시작할 계획이다.
또, 엠텍비젼은 영상인식 기술도 키우고 있다. 영상인식은 사람들에게 친화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본 기술로, 이 회사는 SNS 프로덕트에 집중해 경쟁력을 키운다는 전략이다.
LCD 산업 성장과 함께 LCD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개발하는 팹리스들이 큰 폭으로 성장해 왔다.
국내 최대 팹리스 업체는 LCD 구동칩과 타이밍컨트롤러(티-콘)를 개발하는 실리콘웍스(대표 한대근)다. 실리콘웍스의 제품은 애플 아이패드에 들어가 유명세를 탔다.
실리콘웍스는 지난해 매출 2570억원을 달성해, 국내 최대 팹리스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국내에서는 팹리스가 매출 2000억원을 돌파한 것이 처음이었다. 실리콘웍스는 2010년 35.8% 성장했으며, 올해에도 35~40% 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에는 스마트패드용 칩 공급이 늘어나면서 매출이 급성장했지만 올해에는 TV용 반도체 매출도 증가할 전망이다. 또 조명용 LED 드라이브IC를 비롯해 지속적으로 제품군을 다양화하고 있다.
실리콘웍스에 이어 지난해 매출 2위를 차지한 팹리스는 아나패스(대표 조성대)다. LCD 티콘을 전문으로 하는 아나패스는 지난해 240㎐ 패널 시장 급신장에 따라 전년 대비 69.5% 성장한 938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 회사는 240㎐ 풀HD LCD, LED, 3D TV용 티콘에 이어 FRC(Frame Rate Control), 초고화질용 티콘 등을 개발해 하이엔드 시장을 선점한다는 전략이다. OLED 티콘도 개발 중이다.
두 회사 고속 성장하고 있지만, 모두 한 기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것은 풀어야 할 숙제로 지적됐다. 실리콘웍스는 LG디스플레이, 아나패스는 삼성 매출이 절대적이다.
이들의 뒤를 이은 티엘아이 역시 LCD 관련 반도체 전문 팹리스다. 티엘아이는 지난해 매출 813억원을 올려 팹리스 3위를 기록했다. LCD 티콘은 LG디스플레이에, LCD구동칩은 중국의 BOE-OT에 주로 공급하고 있다. 사업 다각화를 위해 아이앤씨테크놀로지와 와이파이(WiFi) 전문업체인 카이로넷을 인수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메모리 분야 패키지 전문업체인 윈팩을 인수하기도 했다.
◇신시장 개척에 앞장선다=국산화율 제로(0)인 자동차 분야에서도 희망이 싹트고 있다. 씨앤에스테크놀로지(대표 김동진·서승모)는 자동차용 반도체 개발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완성차에 채택되는 쾌거를 최근 올렸다. 오디오·비디오·내비게이션 통합 단말기(AVN) 시스템을 제어하는 반도체를 현대차그룹과 공동으로 개발해 현대모비스에 공급하게 된 것. 텔레매틱스 기능의 단말기에 들어가며 현대차의 미국 판매용 YF쏘나타에 장착될 예정이다.
DMB의 확대로 모바일TV용 칩 전문업체들도 성장했다. RF 전문업체와 멀티미디어 전문업체 간에 DMB 신호를 수신하는 RF와 이를 영상으로 구현하는 베이스밴드 칩을 통합한 원칩 경쟁이 지난 몇 년간 펼쳐졌다. 아이앤씨테크놀로지(대표 박창일)는 이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근 출시되는 스마트폰에 거의 대부분 아이앤씨테크놀로지의 반도체가 채택됐다. 최근에는 다양한 모바일TV 표준 제품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 중이다.
최근 미국 아나로그디바이스로부터 독립한 라온텍(대표 김보은)도 이 분야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다. 과거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스의 사업을 아나로그디바이스로부터 인수한 라온텍은 DMB·ISDB-T원칩에 주변소자까지 넣은 진정한 의미의 시스템반도체를 개발해 큰 주목을 받았다.
휴대폰 분야에서 AP와 함께 주목받는 CMOS이미지센서(CIS) 분야에서도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돋보인다. 삼성전자는 CIS 분야에서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2위 기업과의 격차도 두 배 가까이 벌릴 정도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실리콘화일(대표 이도영)은 하이닉스반도체가 지분을 인수해 공동 개발, 공동 마케팅을 하면서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현재 실리콘화일은 200메가 제품을 주력으로 삼성전자와 LG전자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수출하고 있다. 중국 수출비중은 42% 정도 되며, 매출의 8%는 대만 수출에서 일어난다. 연말이나 내년 초에는 스마트폰에도 이 회사의 CIS가 채택될 것으로 기대된다.
MCU 분야에서는 어보브반도체·코아리버가, 디지털신호처리기(DSP) 분야에서는 자람테크놀로지가 기술력을 뽐내고 있다.
어보브반도체(대표 최원)는 국내 MCU 전문업체로는 1위로, 최근 2위 업체인 이타칩스를 인수해 몸집을 키웠다. 올해 통합 매출 900억원을 전망하는 이 회사는 가전과 소형 디지털기기 분야에서 범용 MCU와 전용 MCU를 고루 개발해 안정적인 성장을 거두고 있다. 또 초창기부터 중국 시장에 진출해 지난해에는 중국에서 1500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MCU 전문업체로 출발한 코아리버(대표 배종홍)는 최근 터치센서 매출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8비트 MCU에서 16비트 MCU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며, 터치센서는 최근 조도센서까지 통합한 칩으로 업계 주목을 받았다. 이외에도 리니어진동모터 구동칩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고속성장 기반을 다졌다.
자람테크놀로지(대표 백준현)는 국내 유일한 DSP 전문업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DSP코어를 개발해 다른 반도체 기업에도 공급 중이다. 대만의 선플러스와 전자부품연구원(KETI), 하이닉스 등이 자람의 고객이다.
보안 분야에서는 넥스트칩(대표 김경수)이 독보적인 입지를 굳혔다. 지난해에는 매출 500억원을 돌파했으며, 순이익도 100억원을 넘어섰다. 영상보안에 필요한 영상처리칩이 주력 제품이다.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보안 제품과 관련된 풀 라인업을 구축한 것도 경쟁력이다. 최근에는 자동차 카메라에 들어가는 영상처리칩도 개발, 새로운 분야로의 영역 확대를 시도했다. 중국시장에도 진출하는 등 매출 다변화를 통해 안정적인 성장을 달성할 기반을 조성한 것도 눈에 띈다.
실리콘마이터스(대표 허염)는 국내에서 유일한 전력관리반도체(PMIC) 전문업체다. PMIC는 그동안 TI·맥심·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다국적 반도체 기업이 장악해 온 분야다. 그동안 다양한 종류의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PMIC 제품군을 개발했으며, 올해에는 모바일과 AMOLED PMIC를 개발할 계획이다. 지난해 두 배 매출 성장을 거둔 데 이어 올해에도 성장률을 이어가 1000억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통신 분야 기술력도 빠뜨릴 수 없다. 퀄컴의 휴대폰 모뎀을 대체할 수 있는 모뎀 칩을 개발한 이오넥스는 상용화에도 성공했으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개발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쉽게도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 회사 출신의 개발자들이 나서 알피언을 설립, 모뎀칩 기술 명맥을 이어갔다.
근거리통신 분야에서는 레이디오펄스(대표 왕성호)가 지그비 전문업체로 자리를 잡았다. 지그비는 전력소비가 적어 전등 제어를 비롯한 홈네트워크용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 회사는 지그비 시장 초기부터 이 분야에 진출해 국내 많은 지그비 개발자를 키워왔다.
오디오 분야에서는 펄서스테크놀로지와 네오피델리티 등이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디지털 오디오 앰프 칩 분야에서 60% 점유율을 차지한 펄서스테크놀로지는 이 분야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퀄컴으로부터 400만달러에 이르는 투자를 받기도 했다. 네오피델리티는 디지털TV에 들어가는 오디오 칩 전문회사로 올해부터 수출을 시작했다.
이종희 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시장 규모와 성장속도뿐만 아니라 연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봤을 때 시스템반도체는 매우 중요한 산업”이라며 “한국 팹리스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기로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면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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