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에 사는 시민 A(59)씨는 유료방송인 케이블TV의 시청자다. 기초생활수급권자인 그는 집의 TV 수상기에 KBS만 나올 뿐 다른 방송사의 채널은 지지직거려서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케이블TV에 가입했다.
한 달에 4천500원짜리 초저가 케이블TV 패키지이지만, TV는 그의 가족에게는 유일하게 문화생활이며 고등학생 딸아이에게는 교육방송을 제공하는 훌륭한 가정교사이기도 하다.
A씨의 가족은 `무리`를 하지 않는 한 내후년이 되면 TV 시청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날로그 방송의 종료에 맞춰 정부가 취약계층의 TV 구입을 지원하고 있지만 A씨의 가족은 지원 대상이 되지 못한다. 유료방송 가입자는 지원 대상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21일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는 기초생활수급권자, 차상위계층, 시청각장애인, 국가유공자 등 취약계층 중 아날로그TV 수상기만 보유하고 지상파방송을 직접 수신하는 가구에 10만원을 지원하거나 디지털 컨버터 1대를 무료로 제공한다.
방통위가 추정하고 있는 지원 대상 가구는 31만 가구다. 전체 취약계층이 168만 가구이니 지원 대상 가구는 이들의 5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셈이다.
이제 A씨는 TV의 디지털화에 따라 방송의 혜택을 못 받는 `디지털 난민`이 될지 아니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디지털TV 수상기를 구입할지 선택해야 한다.
◇디지털 컨버터가 해결사? = A씨의 가족이 디지털TV를 사지 않는다고 해서 내년 연말 이후 TV 시청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A씨는 대신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TV에서 볼 수 있도록 전환해주는 컨버터를 구입할 수 있다.
방통위는 디지털 컨버터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홍보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아날로그 방송이 끝난나고 걱정하며 "적금을 확 깨서 제대로 된 디지털TV를 사겠다"는 개그맨에게 여성 아나운서가 "적금 깰 필요 없다. 아날로그TV에 디지털 컨버터만 달면 무료로 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는 내용이다.
디지털 컨버터의 가격은 6만9천~7만9천원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다. "디지털 컨버터만 달면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아나운서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이 개그맨은 적금을 깨지 않는다면 이전의 아날로그 방송과 달리 왜곡된 화면을 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아날로그TV의 화면 비율은 4대3이지만, 디지털TV의 화면 비율은 16대9이기 때문이다. 가로 길이가 기존보다 길어지는 까닭에 양쪽 끝이 잘리거나, 위아래 검은색 바가 생기거나, 아니면 정상과 달리 화면이 아래위로 길어지거나 하는 식으로 화면이 왜곡되는 것이다. 1980년대 간혹 지상파TV에서 베타 비디오 방식의 영화가 상영되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을 들여 TV 시청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방통위는 컨버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TV 광고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이처럼 화면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은 감추고 있다.
컨버터를 이용한 시청 방식이 갖는 다른 문제는 바로 양방향이라는 디지털TV의 핵심이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취약계층을 비롯한 시청자가 디지털방송의 핵심인 양방향 방송을 즐길 수 없다면 방송 송출과 제작만 디지털 방식을 사용하는 `반쪽짜리` 디지털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90%가 유료방송 통해 보는데…지원은 `전무` = 디지털 전환에 대해 꾸준히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은 정부의 지원 정책이 지상파TV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2009년 4월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의 디지털 전환과 디지털 방송의 활성화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 법률은 법명에 명시된 대로 지상파방송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부의 논리는 시청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방송을 시청하는 유료방송에 굳이 국고를 지원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지만, 이는 전체 시청자의 90%가량이 유료방송을 통해 TV를 보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나온 생각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방통위가 디지털 전환에 맞춰 벌이고 있는 시청자 지원책이나 난시청 해소 사업 등 직간접적 지원 사업은 지상파TV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케이블TV나 위성방송, IPTV 등 유료방송은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다.
이런 까닭에 작년 연말 케이블TV의 경우 전체 가입자 1천510만가구 중 디지털 케이블TV의 가입자 비율은 23%에 해당하는 340만가구 수준에 머물렀다.
정부는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지는 않으면서도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들이 재허가를 받을 때 `디지털 전환에 노력할 것`이라는 조건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케이블TV의 디지털 전환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케이블TV업계의 얘기는 다르다. 아날로그 케이블과 디지털 케이블의 가격 차이가 적지 않은 만큼 정부의 지원 없이는 디지털 전환이 힘들다는 것이다.
디지털 케이블TV의 수신료는 한 달에 3만원 안팎이지만 작년 방통위가 발표한 `2010년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유료방송 가입자의 79.2%는 월 1만원 이하의 저가형 상품을 이용하고 있다. 디지털화를 위해서는 대부분의 유료방송 시청자가 적지 않은 돈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데 정부의 지원은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디지털 전환을 사실상 강제하다시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원은 한 푼도 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며 "실질적인 디지털 전환을 이루려면 정부가 적어도 취약계층을 위해서라도 재정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산 부족?…마인드 부재! = 디지털 전환에 대한 홍보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작년 방통위가 조사한 디지털 전환 인지율은 `아날로그 방송 종료` 인지율이 62.8%, `디지털 전환` 인지율이 73.2%였지만 현실에서 체감되는 인지율은 여기에 훨씬 미치지 못해 보인다. 아날로그 방송 종료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디지털 전환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가 부재한 것이다.
방통위의 `디지털 전환 활성화 기본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작년까지 디지털 전환에 대한 국민적 붐(Boom)을 조성한 뒤 올해와 내년에는 실행을 본격화하고 점검한다는 계획을 짜놓았지만 `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한 것이 사실이다.
방통위는 황수경 아나운서를 홍보대사로 임명해 개그맨 김영희와 함께 출연하는 홍보 광고를 방송하고 있지만 출연자의 인지도가 `붐`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하며 광고 내용도 디지털 전환에 대한 설명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보다 1년 반가량 빠른 오는 7월24일 아날로그 방송을 종료하는 일본에서는 인기그룹 SMAP의 멤버 구사나기 쓰요시(초난강)를 전면에 내세운 방송용 홍보 광고를 2009년부터 일찌감치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일본은 방송의 실제 종료 모습을 보여주는 `종료 방송` 광고를 통해 아날로그 방송 종료 계획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방송 종료 화면에 부담스러워하는 일부 지상파방송사의 반대로 `종료 방송` 광고가 전파를 타지 못하고 있다.
취약계층 지원책 부족, 케이블TV 지원책 부재, 홍보 미비 등 디지털 전환을 둘러싼 문제의 원인에는 부족한 예산이 있다.
일본의 경우 디지털 전환에 드는 비용이 2천200억엔(약 2조9천500억원)인 반면 한국의 경우 아날로그 방송 종료를 불과 1년 앞둔 올해 관련 사업 예산이 412억원에 불과할 정도로 재원이 열악하다.
이처럼 디지털 전환에 대한 예산이 열악한 것은 방송을 바라보는 시각이 문화가 아닌 산업으로 치우쳤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제대로 된 디지털 전환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취약계층을 비롯한 저소득층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방송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방송을 모두가 누려야 할 문화가 아닌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산업으로 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