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천원

 몇 해 전 ‘천원의 만찬’이라는 방송프로그램이 있었다. 출연자가 단돈 천원으로 마련한 식재료로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를 사랑하는 부모나 친구에게 대접하는 내용이다.

 만원으로도 시장 가기 힘든 세상에 천원으로 어떤 요리를 만들겠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두부 한 조각, 과일 반 조각만으로 꽤나 근사한 ‘만찬’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요즘은 그때에 비해 천원의 가치가 더 떨어져 천원에 대한 관심도 많이 줄어들었다. 냄새나는 사과상자를 채우는 것도 만원에서 오만원 지폐로 바뀌는 마당이니 천원은 그저 잔돈 취급을 받을 뿐이다.

 그러던 천원이 이달 초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정부가 통신요금 인하안을 발표하면서 기본요금 천원 인하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천원을 내리느냐 마느냐부터, 천원이라는 인하 폭이 합당한지를 놓고 주무 부처는 물론 정치권까지 달려들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통신요금 때문에 온 국민의 시선을 끈 지 한 달도 채 안 돼 이번엔 방송판에서 천원이 이슈로 등장했다. 당초 물가인상 부담 때문에 미뤄질 것으로 예상됐던 KBS 수신료 천원 인상안이 6월 국회 문방위에 상정되면서다.

 공교롭게도 국민의 통신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내린 통신 기본요금도 천원, 국민에게 보다 나은 방송을 제공하기 위해 올린다는 수신료도 천원이다.

 차이가 있다면 기본요금 천원은 기존의 1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고, 수신료 천원은 기존 대비 40%에 달한다는 점이다.

 천원이라는 화폐 가치는 같지만 한쪽은 ‘천원밖에 안 내렸다’, 다른 한쪽은 ‘천원이나 올린다’는 식으로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오랜 시간 익숙해진 요금을 올리고 내리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협의와 합의다. 통신요금을 인하했지만 누구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이유, 최근 수신료 인상안을 놓고 논란이 일어난 이유도 모두 기본 원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원의 만찬이 유행할 때는 기분 좋으셨을 퇴계 이황 선생. 최근의 천원 싸움을 보시면 어떤 느낌일까. 지갑 속 천원짜리를 꺼내보니 오늘따라 이황 선생의 얼굴이 굳어 보인다.

 이호준 정보통신팀 차장 newleve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