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수칼럼] 자기 파괴적 혁신 시대

 “이 테이프는 5초 안에 자동 파괴됩니다.” 미국 첩보 TV시리즈인 ‘제5전선(미션 임파서블)’ 앞 부분은 늘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정보통신기술(ICT)산업계가 기억해두면 좋을 장면이다. 스스로를 파괴할 만한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 아니면 더 이상의 성장을 담보할 수 없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파괴적 혁신’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가 ‘성공기업의 딜레마’란 책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성공한 기업이 성공한 기술의 혁신에만 매달려 되레 시장 지배력을 잃는 역설을 끄집어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파괴적인 기술’이 느닷없이 등장해 판을 바꾸는 일이 심심찮게 나온다는 분석이다. 그의 통찰력을 실제로 확인시킨 기업이 애플이다.

 애플은 ‘매킨토시’로 ‘애플2’를, ‘아이팟나노‘로 ’아이팟’을, ‘아이폰’으로 ‘아이팟’을 지웠다. ‘아이패드’는 ‘맥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클라우드’로 스스로 문을 연 개인컴퓨터 시대를 끝내려 한다. 애플은 스스로의 성공까지 무너뜨릴 만한 혁신으로 늘 새 판을 짰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던 이 회사가 살아남아 세계 ICT시장 절대고수에 오른 비결이다.

 마이크로소프트도 한때 이랬다. 기존 운영체계(OS)를 잠식하는 새 OS를 끊임없이 내놓았다. 그러나 파괴적 혁신에 주춤한 사이 모바일 시대 주도권을 구글과 애플에 내줬다.

 ‘성공기업의 딜레마‘를 벗어난 기업보다 굴복한 기업이 많다. 노키아는 휴대폰 경쟁사만 견제하다가 전혀 상대로 여기지 않은 풋내기들에게 당했다. 애플과 구글이다. 노키아는 결국 심비안 OS를 접고, MS의 윈도폰OS로 갈아탔다. 올 연말 이후 대역전을 꿈꾸나 쉽지 않은 여정이다.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DS’와 가정용 콘솔 ‘위‘로 게임 시장을 주도한 일본 닌텐도는 요즘 갈 길을 잃었다. 경쟁사가 아닌 애플과 페이스북 때문이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페이스북을 통해 소셜게임이 인기를 끈다. 닌텐도 주특기인 캐주얼 게임이 설 자리가 없다. 닌텐도가 곤두박질한 사이 MS와 소니는 콘솔용 온라인 네트워크로 시장을 지켰다. MS는 동작인식장치인 ‘키넥트’로 ‘위’의 영역까지 침범했다.

 시스코, HP, 오라클, SAP 등은 어떤 상황도 꿈쩍도 안 할 듯한 기업들이다. 이들이 언제 노키아와 닌텐토의 길을 따를지 모른다.

 사실 기업이 상당한 수익을 내는 주력 사업을 쉽게 놓지 못한다. 기득권 버리고 새 사업에 도전하자고 했다간 내부에서 ‘이상한 놈’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세상이 확 바뀌었다. 이른바 ‘듣보잡’이 언제 어디에서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

 파괴적 혁신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나 생존은 보장한다. 게임의 법칙을 바꿀 정도의 혁신이라면 큰 성공도 가능하다. 기존 기술의 혁신만으론 한계가 있다. 이와타 사토루 닌텐도 CEO는 “예전에 해온 것만큼만 한다면 그것이 곧 한계”라고 말했다.

 우리 통신사업자들은 요즘 텃밭을 잠식할 공짜 통신기술의 확산을 막느라 애쓴다. 포털사업자는 구글 모바일과 SNS의 질주에 제동을 걸려 안간힘을 쓴다.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큰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 또 그런다고 생존을 보장 받을까.

 사실 통신과 포털 사업자엔 많은 협력사로부터 나온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져 들어온다. 하지만 거의 내팽개친다. 기존 사업에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다. 심지어 내부 사업부의 기득권 싸움 탓에 검토조차 하지 않는 아이디어도 많다. 우리 사업자들은 ‘파괴적 혁신’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자기 파괴’의 길만 좇는다. 칼을 품은 파괴적 혁신자가 등 뒤에 바짝 다가와 있는 줄 전혀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