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가 PC와 모바일을 버리고 대신 택한 건 기업용 소프트웨어다. HP는 19일 PC사업부 분리·스마트기기 단종과 함께 기업용 검색엔진 글로벌 1위 업체인 영국의 오토노미를 103억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60%의 프리미엄을 얹은 이 가격은 HP 시가총액의 25%를 차지한다.
오토노미는 지난해 매출 8억7040만달러, 순이익 2억1730만달러의 실적을 거둔 ‘알짜’ 기업이다. 이 같은 HP 인수에 연이은 기업용 SW 분야 대형 M&A도 전망된다. 시장분석업체 오도 시큐리티즈는 “IT 분야에서 SW 산업이 가장 전략적 분야라는 것을 각인시켰다”며 “MS와 IBM 등은 또 다른 기업용 SW 강자인 SAP를 노릴 만하다”고 분석했다.
가트너에 따르면 전 세계 기업용 SW시장은 연 2450억달러(2010년) 규모다. 전년에 비해 8.5% 이상 성장한 큰 시장이다. 하지만 이 중 절반을 MS와 IBM·오라클·SAP·시만텍 등 ‘빅5’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100위권 안에 단 한 곳도 없다.
카카오톡·티켓몬스터 등 모바일 B2C 분야 국내시장에서 성공의 가능성을 비추고 있는 서비스 분야와는 달리, 한국의 기업용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 뿐 아니라 내수도 외산에 잠식당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분야가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시장이다. 3650억원대의 시장 중 93% 가까이를 오라클·IBM·MS 등 외국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 DBMS 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알티베이스, 티베로 등 토종 기업들은 전부터 기업용 국내 DBMS 시장 점유율 확대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B2C SW·서비스인 한글과컴퓨터나 아이러브스쿨 등과 같은 ‘잠깐의 영광’도 아직은 누려보지 못했다.
비즈니스인텔리전스(BI)나 고객관리(CRM)·전사자원관리(ERP) 등 다른 기업용 SW 분야도 외국 기업이 각각 92%·80%·77%를 차지하고 있는 등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용 SW시장마저 외산에 잠식당한 것은 △품질·연동성 부족 △국내 공공기관·기업 CIO의 책임회피 △대형 SI기업이 독식하는 입찰 관행 등을 꼽았다.
정태명 성균관대 정보통신공학부 교수는 “국내 기업이 외산과는 달리 국내 SW는 가격을 무턱대고 낮추려고 한다”며 “그러다보니 국내 SW 품질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산 SW 사용 비중을 70%까지 확대한 한 공공기관의 CIO는 “국산 SW 도입에 무모한 시도이며 납득하기 어렵다는 비난이 빗발쳤다”고 털어놨다.
국내 기업용 DBMS 업체들의 점유율 확대가 지지부진 한 사이 오라클은 20%가 넘는 유지보수 요율을 고객사에 강요하며 공급업체임에도 불구하고 ‘갑’이 됐다. 기업들은 고객사이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퍼줬다. 전 세계에서 이렇게 모은 ‘실탄’을 바탕으로 오라클은 2005~2010년 사이에만 44개 업체를 인수하며 더 큰 거인이 됐다.
공공기관의 유지보수요율 합리화나 국내 SW 사용 시 가점을 부여하는 등의 대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무엇보다 활발한 M&A를 통해 영세성을 극복하고 품질과 연동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내 한 지식관리솔루션(KMS) 개발 기업의 사장은 “정부에 ‘우는 소리’ 하기 전에 자체 경쟁력을 얼마나 갖췄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도 “국내시장에 매달리지 말고 글로벌에 바로 도전하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