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카드게임의 ‘붉은 여왕’과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달린다. 앨리스가 깜짝 놀라서 묻는다. “붉은 여왕님, 정말 이상하네요. 지금 우리는 아주 빨리 달리고 있는데, 주변의 경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아요.” 여왕은 대답한다. “제자리에 남아 있고 싶으면 죽어라 달려야 해.”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의 한 장면이다. 생물학자 리벤 베일른은 이를 비유해 ‘붉은 여왕의 역설’ 이론을 제시했다. 이론의 핵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진화하고 우리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환경과 같은 속도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일른은 식물들이 나비의 다리에 꽃씨를 잘 묻혀 종족 번식을 잘 하기 위해 꿀샘을 더욱 깊게 만든 사례를 제시한다. 나비의 대롱도 갈수록 길어졌다.
글로벌 IT시장에서도 ‘붉은 여왕의 역설’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주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 HP의 PC사업부 분사를 지켜보면서 미국 IT 공룡들이 살아남기 위해 질주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HP가 불과 1년 만에 모바일기기 사업을 포기하고 곧바로 13조원대 인수합병을 결정한 것은 압권이다. 경영진의 과감한 결단과 이를 일사천리로 의결하는 이사회의 속도가 무섭다. 글로벌 IT환경 변화 속도가 그만큼 빨라졌기 때문이다.
한 때 ‘빨리빨리 신화’가 통하던 IT코리아가 뒤로 밀린다. 정재승 KAIST 교수는 난관을 뛰어넘는 ‘브레이크스루 혁신’이 성공할 확률은 3%, ‘그거 안돼’가 맞을 확률은 97%라고 했다. 조직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임원이 넘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더는 기꺼이 리스크를 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분기 턴어라운드에 성공한 모바일 소프트웨어 업체 한 임원이 사석에서 털어놓은 질주담은 생생하다. “제자리를 찾아오기 위해 처음 해보는 신사업에서 얼마나 달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은 또 도망가려고 하네요.” 그나마 가벼운 벤처기업이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대기업과 정부가 움직일 때다. 모두 다 같이 뛰어야 ‘IT코리아’ 현상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
장지영 모바일정보기기팀장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