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지속되고 있으나 그 해법은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월가의 시위는 날로 확산하고 있다.
고용증가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주요 국가들은 거의 모든 부문에서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환경에너지 분야다. 오히려 규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화석연료 고갈에 대비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인류의 건강 보호라는 명분 하에 각종 규제가 양산되고 있다.
환경규제의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은 전자제품에 관한 규제도 가장 선도적이다. 대표적인 규제인 유해물질제한(RoHS) 지침을 2005년부터 실시해오다 최근(2011년 7월) 이를 더욱 강화한 개정 법률을 통과시켰다. 재활용규제인 WEEE 지침도 대폭 강화한 법률을 준비하고 있다. REACH·ErP(EUP)·에너지라벨링제도 강화 등 관련 산업계가 따라가기도 숨이 가쁠 정도로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럽의 환경규제를 가장 빨리, 때론 더 앞서가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납·수은 등 6대 유해물질을 규제하는 RoHS도 국가적으로 의무 규제하는 나라는 EU 외에는 우리나라(2007년 이후)뿐이다. 재활용규제인 WEEE는 실질적으로 2000년부터 시행해왔고, 재질구조 개선의무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에너지효율등급표시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도쿄협약에 의한 온실가스 의무감축 국가들조차 아직 강제 규제하고 있지 않은 ‘온실가스에너지목표관리제’를 이미 실시하고 있고 배출권거래제 실시에 관한 법안까지 입법예고를 마치고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EU의 REACH를 벤치마킹한 화학물질등록평가 등에 관한 법률(일명 K-REACH)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가전제품저소음표시제를 실시하는 한편, 재활용 제도를 EU 수준으로 강화하는 등 다양한 규제 정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제도의 강화 또는 신규 도입 시 주요 명분 중의 하나가 ‘산업경쟁력 강화’라는 것이다.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유럽과 우리나라의 경제기반은 많이 다르다. 한국은 아직 제조업에 상당히 비중을 둘 수밖에 없고 EU 등에 수출을 통해 경제 성장을 해나가야 하는 반면에 EU 국가들은 이미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 최근에는 온실가스·기후변화·물질분석 등 환경에너지 분야 서비스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즉 환경에 관한 규제를 강화할수록 자국에 수출하는 국가의 기업 부담은 늘어나지만 역내 관련 서비스 산업은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규제를 도입할 때도 규제 도입으로 인한 득과 실을 면밀히 따져 보고, 자국의 산업경쟁력을 고려하는 사려 깊은 안목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이 EU와 똑같이 RoHS를 도입했지만 시험분석시장의 80%를 다국적 2개 기업이 독식하고 있고 나머지를 30여개 국내 시험기관이 분점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환경규제를 도입할 때 제조업 비중이 큰 우리나라 특성과 산업계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앞서 나간다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해외 기업들에 비해 규제 부담만 크게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는 결국 국제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규제 도입의 속도조절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결론적으로, 국민건강과 환경보호를 위한 규제는 필요하지만 산업의 지속 성장발전을 위한 기업의 대응능력도 같은 비중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전상헌 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부회장 shjeon@gok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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