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 임직원을 만나 상담할 때 흔히 듣는 말이 있다. “계약서를 주는 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서명했다” 이른바 ‘갑’인 대기업과 협상해 봐야 얻을 게 없고 공연히 관계만 나빠지니 그냥 주는 대로 서명한다. 어느 드라마 제작회사 담당자는 방송국이 주는 계약서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과연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협상해 얻을 게 없을까.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협상해 얻을 게 있다. 중소기업의 상황에 부합하는 계약서를 만들 수 있다. 중소기업에 불리한 조항을 포함해도 충분한 협상이 따랐다면 거래상 지위 남용이나 약관규제법 위반이 될 가능성이 적다. 그래서 민감한 사항을 계약서 빈칸으로 두고 협상을 거쳐 수기로 채우는 방식을 권하기도 한다.
중소기업도 협상으로 얻을 게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가 갑을 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사회기는 하나, 계약 상대방이 진지하게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는 데 심리적 부담이 따른다. 특히 중소기업의 주장에 명확한 법적·논리적 근거가 있다면 아무리 대기업이어도 무조건 배척할 수 없다. 중소기업이 요구를 계약서에 관철하지 않았더라도 오가는 이메일이나 자료 등을 보관해 문제 삼을 여지도 있다.
중소기업이 협상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무기는 결국 정보와 지식이다. 누가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졌는지에 따라 협상력이 좌우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충분한 관련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한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협상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 법률상 무효인 조항을 대기업이 강요할 경우 법률상 무효임을 주장해 이를 포기하게 하거나 일단 양보해 계약서에 규정하고 문제될 경우 무효를 주장할 수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콘텐츠사업자를 위해 무료 공정거래법 강좌를 개설하고 변호사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중소 콘텐츠사업자의 협상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무료로 지식과 정보를 얻는 데 만족해선 안 된다. 한 중소기업이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1년 동안 5억원을 투입했다. 이렇게 개발한 콘텐츠와 관련한 계약을 체결하는 데 법률 자문 비용 몇 백만원을 아끼는 게 합리적일까. 빌 게이츠의 성공 비결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대기업에 그냥 팔아넘긴 게 아니라 컴퓨터 매출에 따른 로열티를 받기로 약정한 데 있다. 훌륭한 자문이 빌 게이츠를 성공한 사업가로 만들었다. 우리 중소기업은 훌륭한 콘텐츠를 개발했는데도 관련 계약서가 부실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공정한 콘텐츠 거래를 위해 당사자 간의 충분한 협상이 필수다. 이때 협상력을 가지려면 무료 제공 정보·지식뿐만 아니라 적절한 외부 자문을 적정한 대가를 주고 획득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변웅재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ungjae.byun@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