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쓰나미, 원전, 정전 등 대도시 이상 규모의 재난이 발생했다. 예기치 못한 면이 없진 않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피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고도 별 대책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 신기하다.
사실 우리 생활의 아킬레스건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름과 전기다. 특히 전기의 존재가 중요한 변수다. 자동차가 휘발유로 움직이는 것처럼 가정·학교·회사의 모든 장비와 기기가 전기에 종속된다. 자라면서 지금까지 정전은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나에겐 큰 불편을 초래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정전을 가정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됐다.
정전이 된 아파트는 TV·인터넷 하나 제대로 동작되지 않으며 밤새 추위에 떨어야 한다. 어둠 속에 불안감은 더해질 것이다. 인간으로서 나약하기 이를 데 없음을 되새긴다. 서울에 사흘만 정전이 되어도 씻을 수돗물은커녕 화장실 변기마다 오물이 가득 넘치고, 냉장고의 음식·야채는 모두 썩는다. 자동차 안으로 피난해 온풍기를 틀고, 시골로 도망가고 싶지만 주유소의 기름을 끌어올릴 수 없어 연료통을 채울 수조차 없다. 라면과 비상식량을 준비해도 그 흔했던 라이터와 성냥마저 구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 끓여 먹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할 것이다. 최첨단 스마트폰과 스마트패드가 다 무슨 소용이고 자랑거리가 될 것인가. 통신도 그렇다. 중계기와 액세스 포인트가 비상 배터리·발전기로 버틴다고 하지만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지하철도 버스도 모두 ‘올 스톱’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1000만명 이상이 사는 도시가 아수라장이 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얼마 전 군이 특전사 등을 중심으로 대항 군인을 가상으로 만들어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훈련을 했다고 들었다. 훈련이다 보니 경각심을 고취시키려 그 결과를 다소 과장했을 수 있겠지만 속수무책으로 많은 곳이 뚫리고 폭파됐다고 한다.
이렇듯 ‘아닌 밤의 홍두깨’ 격으로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곤 하지만 닥치기 전까지는 ‘대충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따지고 보면 절벽이 한치 앞인데 우린 너무도 태연하고 낙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올해는 특히 안전과 비상, 사회 기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으면 한다. 지금까지 신기술을 좇고 첨단 기기 개발에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 국민 생활의 아킬레스건을 보완하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문명의 이기가 발달할수록, 생활이 편리해 질수록 재해를 당했을 때 피해가 커진다. 최소한의 통신, 의식주가 해결되는 활동,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정도를 사회인프라로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는 북한과 대치했고, 강대국 간 힘의 균형으로 버티는 지정학적 상황으로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국가다. 한순간에 지진이나 국지도발로 인해 발생하는 재해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고 버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기본부터 다질 수 있는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다.
위기를 새 기회로 만들고 새 산업으로 연결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단단한 모범국가, 어떠한 상황에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구축할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진이든 전쟁이든 한방에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나약한 면이지만 생각이 미치는 범위까지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대응했으면 한다. IT부터 되짚어 보자. 그동안 우리는 커다란 난관에 직면하면 할수록 그보다 더 큰 힘과 응집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새 지평을 여는 성과를 보였다. 우리가 ‘기본부터’라는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할 때다.
신상철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연구위원 ssc@nip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