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크롬, 넌 멋지고 밝은 색을 주지. 푸른 여름을 줘. 온 세상이 햇살 가득한 날이란 생각이 들게 해. 내겐 니콘 카메라가 있어.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그러니 엄마, 제 ’코다크롬‘을 뺏어가지 말아요.”
노래 한 소절이다. 1973년에 나온 ‘코다크롬’이란 미국 노래다. 폴 사이먼이 만들어 불렀다. 전설적인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의 그 사이먼이다. 이런 가수가 노래까지 만들 정도로 ‘코다크롬’은 필름의 대명사다. 이 필름은 ‘신(God)과 인간(Man)이 만든 작품’이다. 개발자 레오폴드 가도스키(Godowsky)와 레오폴드 만스(Mannes)의 이름을 딴 조어다. 유타 주엔 ‘코다크롬 주립공원’도 있다. 이 분지를 세상에 널리 알린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사진 촬영에 쓴 필름 브랜드로 지명을 붙였다. 노래 제목과 공원 이름까지 붙을 정도로 이 필름은 미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이 필름을 만든 ‘이스트만 코닥’이 지난 주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법원에 낸 신청 서류엔 자산 51억달러, 부채 68억달러가 기록됐다. 이 소식은 미국인뿐만 아니라 코닥 필름을 즐겨 쓴 많은 세계인을 추억에 잠기게 했다.
131년을 지속한 코닥이 왜 몰락했나. 이미 경영학 실패 사례로 자주 언급된 회사답게 △디지털 시대 변화 거부 △혁신과 구조조정 미흡 △경영진의 현실 안주 △장기적 투자 부재 △브랜드 마케팅 실패 등 이유도 많다. 라이벌 회사랑 비교해 보면 다 맞는 분석처럼 보인다. 일본 후지필름은 필름산업의 종말에 대비해 구조조정과 함께 의료, 검사장비, 디스플레이 소재까지 다양한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다. 지난해 2조원 대 영업이익이 예상된다.
정말 코닥이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혁신을 외면했을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사실 필름 산업의 종말을 가장 먼저 예측한 업체가 코닥이다. 1975년에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만들었다. 사업 다각화도 적극적이었다. 온라인판매, 온라인사진서비스 등 본연의 사업을 키우는 다각화뿐만 아니라 제약·의료, 디스플레이 소재, 프린터 잉크 사업도 벌렸다. 변화와 혁신 노력을 보면 코닥이 경쟁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어떤 것은 너무 앞서갔다. 다만, 그 노력만큼 성과와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게 이 회사의 불행이다.
따라서 질문은 코닥이 ‘왜 혁신하지 않았는지’가 아니라 ‘왜 혁신이 거듭 실패했는지’로 바뀌어야 한다. 코닥의 혁신은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경영진의 시야각은 ‘디지털 사진’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작 디지털 시대에도 변치 않는 이미지의 가치를 잊었다. 음악의 가치는 레코드 판, CD, MP3로 그릇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다. 시장은 더 커졌다.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로, 이젠 휴대폰, 스마트기기로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활용 범위는 더 넓어졌다. 그러나 세계 일등 업체는 사진의 디지털화만 봤지, 이로 인한 개방과 공유를 통한 신 시장 창출이라는 디지털 생태계를 전혀 알지 못했다.
코닥은 최근 세계 유수 기업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 압박을 전개한다. 이를 통해 수천억원씩 짭짤한 수입도 얻었다. 코닥은 이런 압박을 진작 했어야 했다. 다만, 목적이 달랐어야 했다. 로열티 수입보다 협상을 통한 제휴와 신규 사업 창출이어야 했다. 그랬다면 코닥은 보유 특허 기술뿐만 아니라 회사 가치를 더 높일 수 있었다.
특허로 림과 애플을 압박하는 코닥은 파산보호 신청 직전 삼성전자까지 제소했다. 그런데 이런 공세는 코닥이 ‘뭔가 함께 할 회사’가 아니라 ‘특허 이외엔 더 팔 게 없는 초라한 회사’란 것만 더 부각시킨다. 사진작가를 감동시킨 그 ‘코다크롬’의 색감처럼 선명하다. 뒤늦게 특허권을 돌려받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필름을 돌려받아도 이미 사진 찍을 열정이 식었거늘….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