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이슈] 디지털 액터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침팬지 `시저`가 “NO!”라고 외치던 순간이다.

인간 배우를 제치고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것은 `시저`였다. 훈련된 동물이나 분장 한 배우가 아니었다. 최첨단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실재하지 않는 캐릭터를 통해 구현되면서 끝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가상 세계 캐릭터들이 진화를 시작했다.

혹성탈출:진화의 시작
혹성탈출:진화의 시작

◇얼굴 없는 배우, 영화의 주인공 되다 `디지털 액터`=제 84회 아카데미 시상을 앞두고 앤디 서키스 등 `디지털 액터`를 둘러싼 시상 논의가 급진전되고 있다. `디지털 액터(Digital Actor)`란 실제 배우나 살아 움직이는 존재처럼 화면에 구현된 컴퓨터 그래픽(CG) 캐릭터를 말한다. 디지털 액터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이제 인간배우보다 디지털 기술로 재창조된 얼굴 없는 배우가 주연을 대신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액터 기술은 CG 기술의 `총아`로 영상 특수 효과(VFX)나 3D 애니메이션, 게임, 가상현실 등 CG 제작 인프라 활용에서 나아가 배우의 역할까지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디지털 액터는 영상 촬영 기술 및 컴퓨터 그래픽 처리 기술을 기반으로 표정, 동작 캡처 및 디지털 구현, 영상 표현 등 영상 제작 전반에 걸친 기술이다.

국내 대학이나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관련 기술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심형래 감독은 자신의 영화 `라스트 갓 파더`에서 말론 브란도 구현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초상권 문제로 실제 영화 속에서는 이뤄지지 못했다.

누구도 본 적 없는 공룡을 되살리거나 외계인, 미지의 존재에 생명령을 불어넣는 것이 디지털 액터 기술이다. 대표적 사례가 전세계에서 흥행 신기록을 기록한 `아바타`와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다. 30여년 전 찰턴 해스턴 주연 `혹성탈출` 원작에서 진화한 유인원 역할은 분장을 한 사람들이 맡았지만, 이젠 CG 기술과 얼굴 없는 모션캡처 배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동작에서 표정, 감정까지 잡아낸다`=디지털 액터 기술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은 모션캡처(Motion Capture) 기술이다. 디지털 액터를 실감나게 살리는 데도 결국 사람이 중심이 된 데이터가 필요하다. 모션캡처는 모델이 된 사람을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해 이를 가상의 CG 캐릭터 동작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실감나는 표현이 중요한 게임 제작에도 널리 활용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CT 심층리포트, 2011`에 따르면 모션캡처 방식은 제작비와 촬영 방식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인체 관절에 기계 장치 부착을 통해 인식하는 기계식부터, 여러 카메라가 촬영하는 광학식, 자기장을 발생하는 센서를 부착하는 자기식, 특별한 센서를 부착하지 않는 `마커 프리(Maker Free)` 방식 등이 있다. 이외에도 퍼포먼스 캡처, 동작과 표정을 동시에 잡아내는 `아이모캡(IMocap)`까지 개발됐다.

블록버스터 영화에 주로 쓰이는 이모션 캡처(E-Motion Capture)는 연기와 CG가 함께 이뤄지는 방식이다. 기존 모션 캡처가 배우 움직임을 촬영한 후 컴퓨터 그래픽을 입혔다면, 이모션 캡처는 CG로 구현된 가상공간과 실제 배우를 한 화면에 실시간으로 구현한다.

디지털 액터 기술의 활발한 응용으로 실사영화와 CG 애니메이션 경계처럼 영화 장르도 모호해지고 있다. 영화 `베오울프`는 안소니 홉킨스, 레이 윈스톤, 안젤리나 졸리 등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했지만 이들을 CG로 재현해 화제를 모았다. 영화 장르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자 당시 미국 아카데미위원회는 이 영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분류했다. 이미 미 배우노조(SAG) 산하에는 모션 캡처위원회가 만들어져 전문 배우들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디지털 액터 확산으로 영화 제작비 절감과 상상력 확대가 기대된다. 디지털 액터 기술의 가장 큰 논란은 연기와 몰입 문제다. 실제로 기술 개발 방향도 풍부한 표정 연기가 가능한 세밀한 얼굴 움직임을 잡아내는 `페이셜 퍼포먼스 캡처`에 집중되고 있다. 디지털 액터의 목표는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살아있는 캐릭터 재현이다. 이는 실감나는 연기와 표현에 달려있다.

디지털 액터의 궁극적 지향은 인간과 똑같은 `인형`이 아니다. 일본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제안한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사람과 거의 흡사한 외모의 인형이나 로봇에 대해서는 오히려 혐오감이나 섬뜩함을 느낀다고 한다.

완벽한 인간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어느 정도 비슷하거나 모자란 부분에 안심을 느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디지털 액터가 전면으로 등장한 영화 중 널리 사랑받은 캐릭터가 `골룸` `아바타` `시저` 등 비 인간형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배우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도 인간형 디지털 액터 구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불안정한 감정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재현은 인공적 상황을 더욱 부각시킬 수도 있다. 모션 캡처 전문 배우인 `앤디 서키스`도 중요한 것은 캐릭터 동작의 실감나는 재현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과 교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영상혁명이라 불렸던 영화 `아바타`의 이야기도 결국 신화적 공간을 빌어 재탄생한 서부개척 시대 이야기다. 영화 `아바타`가 창조해낸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캐릭터는 우정과 사랑을 통해 친밀감을 쌓았고 관객들과 공감에 성공했다. 디지털 액터는 최첨단 기술과 인간적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감정표현이 만나는 일종의 `감성 기술`이다. 환상과 현실, 창조와 복제, 진짜와 가짜 사이에 `디지털 액터`가 있다.

“I SEE YOU.”

김명희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