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T 거버넌스, 새판을 짜자](1)프롤로그-새로운 미래를 위한 출발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 `정보통신산업 발전과 정부조직의 설계`라는 주제로 차기 정부 조직개편과 관련한 대규모 세미나가 열렸다. 별 다른 홍보가 없었지만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350석 규모 회의장이 꽉 들어찼다. 본격적인 선거철 전이지만 정부 조직개편에 대한 높은 관심이 그대로 엿보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지난 4년 동안 시행착오를 기반으로 국가정보화 체제를 위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남았지만 사실상 정보통신기술(ICT) 거버넌스를 찾기 위한 열기로 정부와 산업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요 IT지표별 경쟁력(출처: 국가정보화 전략위원회)
주요 IT지표별 경쟁력(출처: 국가정보화 전략위원회)

ICT 거버넌스 논의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정권 초기 물밑에서 제기되던 ICT 조직개편 목소리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간헐적으로 나오던 목소리가 지난해 중반을 기점으로 공론화했다. 정치권을 비롯한 협회와 단체는 총론 수준을 넘어 각론까지 이미 밑그림을 내놓고 있다. 정부부처 내부에서도 차기 조직 방향을 수립 중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을 열고 “집권하면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를 부활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미 사퇴 의사를 밝히고 물러난 상황이지만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도 직간접적으로 “차기 정부에서는 방통위 조직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해 왔다. 현 집권 여당조차도 지금과 같은 정부조직에 문제가 있음을 자인한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개편 필요성을 제기했다. 민주통합당은 지난해 8월 ICT정책을 총괄하는 `정보미디어부(가칭)` 신설을 포함한 부처 개편안을 당론으로 잠정 확정했다. 정보·방송통신 융합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독임부처가 필요하다는 게 주장의 골자다.

창조한국당도 10월 방송통신위원회를 규제 기능에 특화한 독립규제위원회로 개편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은 상황이다. 완벽한 독임부처 성격은 아니더라도 진흥과 규제를 보다 명확하게 추진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단체도 정부 조직개편에 힘을 보태고 있다.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은 지난해 말 정보기술과 과학기술을 각각 전담하는 독임부처 신설을 주장했다.

거버넌스 논의가 활발한 배경은 명확하다. 세부 밑그림은 다소 다르지만 큰 줄기는 대동소이하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조직체계를 만들자는 상식 같은 이야기다. 지난 정권의 시행착오를 교훈삼아 잘못된 부분을 뜯어고치자는 요구다.

현 정부는 출범 당시 `유능하고 작은 정부`를 목표로 기존 18부 4처를 15부 2처로 축소했다. `대(大)부처주의`를 추구하면서 서로 성격이 다른 부처를 하나로 묶은 정책은 기대 이하였다. 특히 방송통신과 과학기술 분야 평가는 낙제점이었다. 현 정권 내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방송은 지나치게 정치 편향적이었고 통신은 사실상 정책이 없었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위원회 성격상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지면서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통신에 부작용이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지식창조 시대 문턱에 진입했지만 핵심 역할을 맡을 IT는 융합이라는 큰 취지가 무색하게 오히려 시장과 산업에서 동떨어졌다. 복수의 부처가 기능적으로 업무를 쪼개 가지면서 중복과 혼선 등 비효율성도 발목을 붙잡았다.

결과적으로 `IT 강국`이라는 명성이 부끄러울 정도로 지난 4년은 우울한 시기였다. 각종 글로벌 IT 지표는 제자리걸음에 그치거나 오히려 뒤처졌다. EIU(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IT산업 경쟁력지수는 5년 연속 하락했다.

ICT개발지수 보고서에서 2006·2007년 2년 연속 1위였던 순위도 흔들리고 있다. 떨어진 배경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하락하는 추세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산업계와 소비자가 IT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IT와 함께 미래 먹을거리를 위한 성장동력인 과학기술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가 R&D 예산을 꾸준히 확대하고 과학벨트를 설립하는 등 기초연구 기반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과학계에서 앞장서서 과학기술부 폐지로 과학 발전을 위한 환경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새로운 밑그림이 단순한 옛 정통부나 과기부의 부활이라면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기 힘들다. 과거 정부가 잘했던 점을 추리고 잘못했던 점을 걸러 새로운 거버넌스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적어도 앞으로 5년 이상을 내다보고 ICT와 과학기술 미래를 예측해 이에 합당한 거버넌스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 이병기 전 방통위 상임위원은 “ICT 거버넌스를 효율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점에 모두가 공감하는 만큼 폭넓은 의견수렴과 충분한 연구 분석을 거쳐 최적의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내년 차기 정부 출범에 앞서 다양한 의견교환 과정을 거쳐 공감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자칫 지난 조직개편처럼 인수위의 일방통행식 개편을 답습한다면 다시 쓰라린 실패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 김동욱 정보통신정책개발원장도 “ICT 거버넌스 개편이 특정 부처를 부활하는 형태라면 국민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이해관계에 편승한 주먹구구식 조직개편은 결국 또 다른 이기주의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미래 거버넌스 논의는 무엇보다 공론의 장을 먼저 만들고 정확한 시장과 기술 흐름, 시대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취재팀=강병준 팀장(bjkang@etnews.co.kr), 이진호, 장동준, 김준배, 윤대원, 이호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