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한국엔 왜 뉘앙스가 없나

뉘앙스(Nuance)라는 회사가 있다. 세계 제일 음성인식업체다. 미국계 회사로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지사를 두고 있다. 1992년 설립됐으며 수많은 회사를 인수합병(M&A)하면서 성장했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국내 대기업 모두 뉘앙스 고객이다. 연간 매출은 우리나라 돈으로 1조4000억원쯤(지난해 13억1870만달러 기록) 된다. 한국에서 올리는 매출도 상당하다. 라이선스 기준 연간 500억원 안팎이 될 것으로 관련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국내 음성인식시장의 80% 정도 되는 규모다. 수익성도 탁월하다. 지난해 매출의 30%(3820만달러)를 순익으로 올렸다. 뉘앙스라는 골리앗에 대항하는 국내 음성인식업체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핵심기술인 자체 엔진을 가진 곳이 세 곳 안팎이다. 이들의 매출을 합쳐봐야 100억원 정도다. 뉘앙스의 1%도 안 된다.

음성인식 연구는 30여년 전 시작됐다. 세계서 가장 먼저 음성인식기술을 상용화한 곳은 AT&T로 1990년대 전화번호 안내서비스 등에 처음 적용했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 초반 삼성, LG 등에서 음성인식 휴대폰을 출시했지만 오류가 많아 대중화에는 실패했다. 음성인식 기술이 다시 부상한 것은 애플 때문이다.

애플이 지난해 10월 `시리(Siri)`라는 음성인식 기술이 들어간 스마트폰(아이폰4S)을 발표하면서 이 기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람 질문을 알아듣고 답하는 스마트폰에 사용자들은 신기해하며 환호했다. 애플뿐 아니라 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도 핵심제품과 서비스에 이 기술을 잇달아 적용하고 있다.

세계 시장 규모도 계속 커지고 있다. 2005년 10억1000만달러에서 2011년 37억달러로 연평균 22%라는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다. 사용처도 전자제품을 넘어 자동차·의료·방송·교육 같은 비IT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기술력만 보면 국내업체들이 뉘앙스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업계는 뉘앙스가 100이라면 우리는 92정도는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데이터베이스(DB) 등 인프라다. 음성인식 기술은 언어와 말을 기반으로 한다. 언어 DB 같은 기술 상용화를 위한 연구 인프라가 중요하다. 뉘앙스 경쟁력도 여기에 있다. 수많은 기업을 인수하면서 성장한 뉘앙스는 유럽권, 영어권 등 세계 여러 나라 언어를 커버할 수 있는 DB와 인프라를 갖고 있다. 한국에서도 뉘앙스 같은 기업이 나오려면 음성인식 인프라 투자가 대대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특히 말과 언어는 그 특성상 투자가 장기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애플 시리는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2000년 중반 진행한 대규모 인공지능 프로젝트가 시초다. 이 프로젝트 결과 떨어져 나온 회사가 시리고, 애플이 2010년 인수했다. 시리를 탄생시킨 산파인 DARPA가 지난 20여년간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연구 및 투자하고 있는 분야가 음성인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방은주 경인취재부장 ejb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