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일본 총선을 통해 정치계에 입문한 렌호 민주당 참의원. 미모의 모델 출신이자 방송진행자로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다. 그는 그해 11월 일본에서 처음 도입된 예산공개심의에서 재차 스타가 됐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방송에서 그는 각료들을 송곳 같은 추궁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나왔던 유명한 말이 “세계 1위를 할 필요가 있나. 2위하면 안 되는가”였다. 이 말은 슈퍼컴퓨터 개발 예산의 파격적인 삭감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국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치밀한 분석과 시원한 언변은 장기적인 불황으로 시름을 앓던 국민에게 청량제였다.
이 장면을 본 마쓰가와 도시히데 교수는 “쇼 같다. 과학에 무지한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놨다. 유학 경험이 없으면서도 순수학문에 전념해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일본 과학계 우상이 됐던 그다. 그는 과학을 보는 편협한 정치적 시각을 개탄했다.
이후 정부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일본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과 과학기술 원로들이 한 데 뭉쳤다. 성명서를 내고 과학투자 당위성을 백방으로 알려 집권당을 설득했다. 효과는 있었다. 예산은 일부 삭감됐어도 프로젝트는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결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 `케이(京)`가 2011년 일본에서 탄생됐다. 2005년 이후 미국, 중국에 슈퍼컴퓨터 1위를 내줬던 일본 과학계는 7년 만에 권좌 탈환에 쾌재를 불렀다. 국민에겐 자부심을 심어줬고, 청량제 이상의 효과를 줬다.
과학기술 특히, 기초과학 투자는 미래를 위한 희망을 키우는 작업이다. 미국, 일본, 독일 등 과학 선진국 모두 경기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기초과학 기술 투자를 유지, 발전시켜온 나라다. 정권이 바뀔 때면 과학기술 정책 또한 따라 변하는 우리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 정부도 모를리 없다. 현 정부는 과학기술부와 교육인적자원부를 통합하며 시너지 효과 창출을 장담했다. 2008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은 “유치원생부터 교육과정에서 과학기술 마인드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2~3년 뒤면 두 부처의 통합이 오히려 잘 됐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로 3년 반이 지났다. 현실은 이상을 따르지 못했다.
“부처 통합에 따른 시너지를 거두지 못했다”며 과기 원로들은 쓴소리다. 통합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에는 “교육만 있고 과학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연간 53조원가량인 교육과학기술부 전체 예산 가운데 과학기술 예산이 4조원에 불과한 데서 심한 불균형을 절감할 수 있다. 과기기술 정책 컨트롤타워 부활 취지로 지난해 상반기 출범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바라보는 과학기술계의 표정도 실망 그 자체다.
일본의 사례처럼 정부가 흔들릴 땐 과학기술 원로들이 그 중심을 바로잡아야 한다. 과학기술을 더 잘 아는 건 정치인이 아닌 과학기술 원로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도 정부의 시행착오가 보인다면 과학기술 원로가 목소리를 내 줘야 한다.
단, 대통령선거 철마다 연구실을 비워 놓고 강의실엔 학생만 남겨 둔 채 불나방처럼 후보자캠프로 모여드는 폴리페서(polifessor)는 정중히 사절한다. 진정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원로만 환영한다. 내일은 스승의 날이다. 은혜를 하늘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은 나라님, 선생님, 부모님밖에 없지 않은가. 부디 기를 펴고, 후학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힘내시길.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