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쯤이다. 전자부품 분야를 취재하던 시절이다. 당시 업계 화두는 수입 대체품 개발이었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전자부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용 0.5㎜ 이하 협피치 커넥터·초소형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대용량 필름콘덴서·칩저항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수입대체효과가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에 이르기도 했다. 그만큼 외국 기업은 폭리를 취했다. 제품 국산화는 애국하는 일이었다. 전자부품 기업은 애국기업으로 통했다. 국내 기업은 가격 대비 뛰어난 성능을 무기로 외산 제품을 대체해 나갔다.
외국 기업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국내 기업이 어렵사리 제품을 국산화해서 시장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견디다 못해 국내 기업이 두 손 들고 나가면 외국 기업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가격을 올려 받아 수익을 챙겼다. 과거 선진 외국 기업이 국내 기업을 압박하고 시장을 장악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요즘엔 이들 기업의 시장 공략 방법이 진화했다. 과거 시장 지배력과 가격으로 후려치던 기업들이 이젠 지식재산권을 활용한 특허분쟁으로 위협한다. 특허를 자산으로 보는 인식이 확산함에 따라 특허 확보는 물론이고 특허를 둘러싼 특허분쟁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특히 융·복합화를 선도하는 전자·정보기술(IT) 관련 특허분쟁은 심각하다.
미국 연방지방법원에 접수된 전자·IT 관련 특허분쟁은 2009년 556건에서 2010년과 2011년에는 각각 623건과 777건으로 늘어났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전자·IT 관련 국제특허분쟁도 늘어나는 추세다. 국제특허분쟁은 기술 경쟁력과 시장 지배력이 커질수록 늘어난다.
일단 국제특허분쟁에 휘말리면 제품 영업이 사실상 중단된다. 수출을 강점으로 하는 우리 전자·IT산업은 부진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IT산업의 수출 비중은 지난 2006년 35%에서 2009년에는 33%로 감소했다. 급기야 지난해 28%까지 낮아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중소·중견 전자·IT기업의 35%가량은 지식재산권 관련 인력이 전혀 없다. 60%는 수출할 때 지재권 관련 조사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스스로 특허분쟁이 일어날 소지를 제공하는 셈이다.
정부는 지재권의 중요성을 감안해 특허출원이나 발명 장려, 지재권 보호 등에 매년 1조2000억원 수준의 예산을 편성해 지원한다. 하지만 기업의 수출을 방해하는 골칫거리인 특허분쟁을 예방하고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응·지원하는 예산은 지재권 관련 예산의 1%도 안 된다. 연간 16조원을 투입해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것도 좋지만 애써 개발한 지재권을 지키는 데도 강력한 정책이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문정 논설위원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