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무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다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다. 밖에서 실컷 놀다 집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등목`이었다.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게 들릴 것이다. 땀 흘린 후 등에 쏟아지는 물의 시원함이란 오늘날 에어컨 바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불과 30년 전 일이다. 그때도 여름엔 무척 더웠다. 당시에는 더위를 이겨내는 일이 국가적 이슈라기보다는 개인의 문제였다. 마루엔 발을 쳐서 빛을 차단하고 바닥엔 시원한 돗자리를 깔고 밤이면 모기장을 치고 잠을 청했다. 그때의 여름은 분명 더웠지만 운치가 있었다. 우리의 여름나기는 하나의 `문화`였다.
세월 많이 좋아졌다. 그런 풍경 속에서 자랐지만 우리 집에도 에어컨이 있고 에어컨이 달린 차도 몰고 다닌다. 사실 더위를 느끼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사무실은 한 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고, 엘리베이터 타고 주차장에 내려와 곧바로 차로 가서 에어컨을 트니 더위를 느낄 새도 없다. 더위는 이겼지만 대신 우리는 인내심을 잃었다. 춥거나 더운 건 못 참는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에어컨이나 히터가 발명됐지만 문화는 사라졌다. 더위를 즐기며 살았던 옛날 피서 법을 다시 찾는 사람은 없다. 에어컨은 여유의 상징으로 혼수품 목록에도 반드시 오른다. 선풍기보다 전력소비가 30배 많다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나라 에너지소비량은 세계 최대 수준이다. 해마다 연평균 2.7%씩 증가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의 에너지 소비는 매년 줄어드는데 우리는 역행하고 있다. 소득 대비 전력소비량이 OECD 국가 평균의 배 수준이라는 사실은 생각해봐야 하는 대목이다.
당장 올여름이 문제다. 전력 수요는 크게 증가하는데 공급능력은 줄었다. 하절기 동안 예비전력이 400만㎾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직 6월 초다. 그런데 벌써 에어컨을 펑펑 틀어댄다. 이대로라면 7, 8월은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 자칫 방심하다가 대규모 정전이 발생할 수 있다. 절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실내 냉방온도는 26℃ 이상으로 유지하고, 전력사용이 몰리는 오후 2시부터 5시 사이에는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문 열고 냉방기를 가동하는 영업 관행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열린 문 사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4층 미만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고 불필요한 조명을 소등하는 작은 실천도 모이면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래봤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고 생각하겠지만, 효과는 상상 이상이다. 지난 동절기에 우리 모두는 유난히 춥고 불편한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전력위기를 피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제주도민이 1년간 쓸 수 있는 전력을 절약했다. 우리 국민의 힘으로 동절기 3개월 동안 화력발전소 4기를 추가로 만들어 돌린 셈이다.
정부도 국민에게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공공기관은 지난해보다 에너지를 5% 절감하기 위해 실내온도를 28℃로 유지하고 있고, 지역별로 냉방기를 30분 간격으로 가동 중단하는 등 절전에 앞장서고 있다. 경제계도 `범경제계 에너지절약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절전 캠페인에 나서면서 하절기 절전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무더운 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절전 운동이 문화로 자리 잡게 되면 우리는 부채로 무더위를 쫓았던 그 느린 시절의 운치를 되살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올여름에는 절전으로 힘차게 뛰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려본다.
송유종 지식경제부 에너지절약추진단장 soryse6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