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돈의 인사이트]정치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대기업과 금융권이 정부와 짜고서 부자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극우파와 극좌파 정치세력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로버트 라이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주상돈의 인사이트]정치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연말 대선이 다가오면서 헌법이 규정한 `경제민주화` 조항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주요 대선후보들이 헌법 119조 2항에 근거한 대기업 규제 공약을 준비 중이다. 이 공약으로 직접적 영향을 받을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헌법 119조 2항은 `국가는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헌법 제123조 역시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고 명문화했다. 이에 반해 헌법 119조 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한다`고 규정했다. 자유시장 원리를 기본으로 하되, 그 과정에서 소외될 수 있는 경제적 약자를 위해 보완 조치를 시행할 수 있다는 게 헌법학자들의 해석이다.

헌법 119조 1, 2항 해석을 둘러싼 정치권과 재계 갈등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법학계에서도 계속된 논쟁거리였다. 특히 대·중소기업간 불공정거래나 양극화 문제는 정치권 공방의 단골 메뉴다. 그럴 때마다 정부는 또 쉴 새 없이 새로운 정책을 쏟아낸다. 역대 어느 정부도 중소기업 육성을 강조하며 거창한 지원정책을 내놓지 않은 적이 없다. 중소기업기본법, 중소기업진흥촉진법, 벤처기업특별법, 창업지원법, 소상공인특별법 등 중소기업 운영에 직간접 영향을 미치는 법령이 무려 700개다. 중소기업 관련 정책도 1600가지로 모든 부처가 걸쳐 있다.

법과 제도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은 이미 전 세계가 부러워할 `중소기업 천국`이다. 경제민주화 문제는 법·제도의 차원을 넘어선다. 중소기업에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정치권 공방이 딴 나라 얘기로 들리는 이유다. 여야가 아무리 강경한 목소리로 경제민주화를 외친다고 해도 대·중소기업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정치권 공약의 결과가 어떨 지는 정부 스스로도 알고, 중소기업은 더 잘 안다. 정치권을 믿다가 오히려 낭패 당하기 십상이다. 어제 오늘의 얘기도 아니고 크게 달라질게 없다.

제품 생산에서 소비까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다. 1960~1970년대 산업화 시기와 달리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끄는 주체는 기업이다. 정부가 시장보다 강할 수는 없다. 정부 전체 예산 중 경직성 자금을 제외하면 공익과 복지에 쓸 수 있는 돈은 불과 10조원 정도다. 대기업 중에는 분기 영업이익이 10조원이 넘는 곳도 있다. 시장경제에서 힘의 균형은 이미 기업으로 넘어갔다. 결국, 중소기업이 믿을 수 있는 것도 스스로의 경쟁력과 시장 밖에 없다.

우리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시켜온 가장 훌륭한 제도라고 믿는다. 누군가 힘들게 만든 아이디어와 기술을 강제로 빼앗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행위를 걸러주는 명확한 `경쟁의 룰`만 지켜져도 많은 것이 해결된다. `사회적 약자(弱者)를 위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게 하는 것.`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의 기본정신이다. 이런 기본정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역할은 충분하다. 사회 전체를 뒤집는 혁명이 아니라면, 정치가 시장을 이길 수 없다.

주상돈 벤처경제총괄 부국장 sd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