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태풍과 함께 큰비가 몰아친 직후라서 온몸이 끈끈하다. 선풍기에선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 그러나 에어컨을 켜면 금세 뽀송뽀송해진다. 한번 맛을 들인 후 에어컨 전원 스위치에 자꾸 손이 가니 이건 마약이다. 110년 전 에어컨을 개발해 상용화한 윌리스 캐리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가 알기로는 그가 에어컨을 개발한 날이 7월 17일이다.
무더운 여름, 집에 에어컨이 있거나 에어컨을 설치한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에어컨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다. 전기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사람에게 에어컨은 전기 먹는 하마다. 애물단지다. 전력피크 기간 전력수급에 빨간불이 켜지게 하는 악마 같은 존재다.
장마 기간 물 폭탄을 맞았던 일본은 뒤이어 찾아온 무더위에 비상이다.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원전 가동도 여의치 않은 터라 전력수급에 비상등이 켜졌다. 지난 17일 35도를 넘는 무더위에 홋카이도전력을 제외한 8개 전력회사의 전력수요는 올해 들어 최고치를 경신했다. 에어컨 때문이다. 무더위가 갓 시작된 시점이라 일본 전력회사는 걱정이 태산이다. 올여름은 예년보다 기온이 높은데다 가정에서 에어컨 사용이 급증할 여름방학이 시작된 터라 고민이 많다. 그들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 건 정부와 도쿄전력이 벌이는 전기요금 인상폭 논의가 타협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여름철 전기수요를 다소 억제할 수 있는 희망도 생겼다.
전기요금 인상폭은 도쿄전력이 요청한 10.28%보다 낮은 8.5% 선에서 절충될 전망이다. 일본의 전기요금은 우리나라보다 배 이상 비싸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가 요금인상을 허용하는 것은 공적자금까지 투입한 도쿄전력의 경영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단, 정부는 엄격한 조건을 달았다. 도쿄전력의 인건비를 30%가량 낮추는 등 자구노력을 펼칠 것.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서란 얘기다. 이 역시 지난 17일의 상황이다.
장소를 우리나라로 옮겨보자. 17일 지식경제부 전기위원회는 한국전력이 제출한 전기요금 16.8% 인상안을 부결했다. 지난달 8일에도 전기위원회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며 한국전력의 인상안을 되돌려 보냈다. 이렇게 전기위원회와 한국전력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전력예비율은 지난 9일 5.82%까지 급락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태풍의 북상으로 요사이 궂은 날이 반복되면서 기온도 떨어져 전력사용이 줄었다는 점이다. 강원도와 동해안에는 수년 만에 이상저온 현상도 찾아왔다. 천우신조다. 걱정되는 건 장마가 끝난 다음 상황이다. 올해 더위는 정부가 평소보다 한 달이나 앞당겨 절전운동을 시작했어야 할 만큼 심상치 않다. 지난 5·6월 두 달간 전력예비율이 10% 이하로 떨어진 날이 33일이나 된다. 작년 같은 기간 2일보다 16배나 늘었다. 전기요금 인상폭을 놓고 정부와 한국전력이 몇 개월씩이나 핑퐁 게임을 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전기요금 인상 공방전을 바라보는 여론이 좋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론은 더 나빠졌다. 정부는 인상폭이 과다하다, 종별 요금 형평성이 고려되지 않았다, 한국전력의 경영쇄신 노력이 부족하다 등 막연한 지적이 아닌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줘야 한다. 한국전력 역시 다수가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수준의 쇄신안을 더 늦기 전에 내놔야 한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보여준 것처럼. 태풍이 지나갔으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지난해 치렀던 블랙아웃(순환정전) 홍역을 올해 또 경험해선 절대 안 된다. 블랙아웃 재발 여부를 하늘의 뜻에 맡기는 건 정말 무책임한 일 아닌가.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