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02>전 대통령"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TDX(2)-전 대통령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전자교환기(TDX) 개발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정부가 들어선 1981년 이후부터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자교환기 독자개발을 지시했지만 진행은 더뎠다.

체신부는 전국통신망을 자동화하고 시분할 전자교환기를 도입해 농어촌 전화 확대를 위한 기본계획을 1979년 4월 수립했다. 이어 8개년에 걸쳐 전자교환기를 설치하고 전송로를 디지털화하는 농어촌 전화현대화계획을 그해 10월 확정했지만 계획이 실행으로 바뀌는 데는 장애가 많고 시간이 필요했다. 교환기연구는 기초단계에 머물렀고 실적은 미비했다. 연구개발비는 6억원에 불과했다. 연구인력은 10여명이었다. 이런 가운데 1979년 10·26사태가 발생했다. 정국은 혼란과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전자교환기개발은 뒷전으로 밀렸다.

1980년 9월 1일 오전 11시.

그해 8월 최규하 대통령(작고)이 하야하고 이날 전두환 대통령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 대통령은 서울잠실실내체육관에서 거행된 취임식에서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과감히 도입해서 우리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는 국정운영의 포부를 밝혔다.

전 대통령은 9월 3일 대통령 수석비서관 인사를 단행했다. 경제수석비서관에 김재익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경제과학분과위원장(1983년 10월 순직)을 임명했다.

김재익 경제수석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시절부터 전자식교환기 도입만이 한국 전화적체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갖고 이를 강력히 추진했다. 그가 경제수석이 되면서 통신혁명을 위한 정책은 추동력을 얻었고 그는 통신혁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그 뒤에는 전두환 대통령이란 절대 권력자의 각별한 신임이 있었다.

전 대통령의 김 수석에 대한 신임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전 대통령과 김 수석이 나눈 대화다. 전 대통령이 자신을 경제수석으로 임명하려하자 그는 다짐받 듯 말했다.

“각하, 제가 생각하는 경제정책은 인기도 없고 또 기존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만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제가 경제수석으로서 각하를 모시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려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칠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절대 권력자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언행은 자칫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이를 계기로 김재익은 전 대통령의 절대 신임이란 열쇠를 쥐게 됐다.

전 대통령은 김 경제수석을 신뢰하고 그의 능력을 믿었다. 전 대통령은 김 경제수석이 추진하는 정책은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사람을 쓰면 믿는 것이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었다.

전 대통령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시절 비서실에서 그의 일정을 도맡아 관리했던 홍성원 박사(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KAIST 서울분원장,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회장 역임)의 말.

“전 대통령의 리더십입니다. 전 대통령은 어떤 일을 누구에게 맡기면 그가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잘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는 솔직하게 `내가 뭘 아나, 자네가 책임지고 잘해`라고 하셨습니다.”

전 대통령은 그해 10월 7일 서울 영동종합전시장에서 열린 제11회 한국전자전에 참석, 개막테이프를 끊고 1시간 20분 동안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전 대통령은 이날 전자식 전화교환기와 군통신장비 성능에 각별한 관심을 표시하고 “성능향상에 더욱 노력해 우리기술로 전자제품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하고 수출신장에도 이바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전 대통령과 김재익의 만남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처음 김재익을 관계(官界)로 끌어들인 사람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서강대 교수, 부총리, 한국무역협회장 역임)였다.

김재익은 1938년생으로 경기고를 2년 수료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수재였다.

한국은행에 수석으로 입행해 조사부에서 일하면서 서울대대학원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학구열을 버리지 못한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하와이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끝내고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은행에 복직했다가 1974년 남덕우 부총리 비서실장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을 역임했다. 1980년 6월 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장으로 발탁돼 전두환 대통령의 최고 경제브레인 역할을 했다.

남덕우 부총리의 회고.

“내가 서강대 교수로 있을 때 어느 날 그가 연구소로 자료 수집을 부탁하러 왔다. 얼굴이 희고 몸매가 날씬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정신과 사고가 매우 맑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후 내가 196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원 초청으로 그곳에 갔더니 김재익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 다시 만났다. 곽수일 전 서울대 교수(현 명예교수)도 유학생이었다. 몇 년 후 그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나를 찾아 왔기에 그를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발령 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 직제에 기획국장 자리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만 임명할 수 있는 일반직이라고 해 도리 없이 그를 내 비서실장으로 채용했다. 나는 관료조직의 폐쇄성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용휴 총무처 장관(국방부 차관 역임)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김 장관은 내 부탁을 받아들여 기획국장에 별정직 공무원도 임명할 수 있게 직제를 개정했다. 나는 그를 기획국장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새로운 안목으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편성했다.”(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1980년 5월 하순경.

관료생활에 지친 김 국장은 공직을 그만두고 한국개발연구원(KDI) 객원연구위원으로 새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바로 그날 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장으로 발령이 났다. 세상일은 변수의 연속이었다.

당시 김원기 부총리(무역협회장, 국민대학교 이사장 역임)가 김 박사에게 국보위행을 통보했다. 김재익은 이를 거절했다.

“이미 사표를 낸 상태여서 저는 기획국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가 살벌해 마냥 버틸 수가 없었다. 그의 아내인 이순자 여사(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역임)는 “모든 걸 놓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자”고 반대했다.

당시 그를 추천한 사람은 박봉환 경제과학심의위 사무국장(동자부 장관 역임, 작고)이었다. 그는 국보위에 참석해 전두환 당시 상임위원장에게 고사 의사를 간곡히 전했다.

이순자 여사의 회고록 증언.

“남편은 몇 가지지 이유를 들어 고사했다. 이미 자신은 경제기획원에 사표를 냈고 더욱이 건강이 좋지 않아 중책을 맡기 어렵다는 점을 간곡히 말했다. 하지만 전 위원장은 막무가내였다.”(`시대의 선각자 김재익`에서)

하지만 이 만남이 한국경제를 살리는 등불이 됐다. 김 박사는 전 위원장의 경제가정교사 역할에 충실했다. 경제에 백지인 전 위원장 머리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라는 큰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의 경제 강의는 간결하고 명쾌했다. 그는 날마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 위원장 집으로 달려가 2시간씩 경제 강의를 하고 출근했다. 강행군이었다.

전 위원장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경제에 대해 의문이 생기면 김 박사에게 질문을 했다. 김 박사는 퇴근길에 전화로 질문을 받아 인근 다방에 들어가 답변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는 국가경영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과 원칙,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경제 제갈공명`이었다.

오명 박사(체신부장관·과기부총리·건국대 총장 역임, 현 웅진에너지·폴리실리콘 회장, KAIST이사회 이사장)와 김 수석의 만남도 운명적이었다. 경제학자와 전자공학자의 만남은 산업후진국인 한국을 정보통신강국으로 만드는 전환점이 됐다.

경기고와 육사(18기)를 졸업하고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오 박사는 미국 뉴욕주립대로 유학, 그곳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육사에서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 박사는 그곳에서 전자파를 이용해 땅굴을 찾아내는 장비와 포병 사격용 컴퓨터를 개발했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자 상공자원분과위원으로 일하게 됐다. 오 박사는 그곳에서 전자산업 발전 방안을 마련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국보위가 해체되자 그는 국방과학연구소로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월초 어느 날 저녁 오 박사는 김재익 경제수석의 전화를 받았다. 저녁 식사를 하자는 전화였다. 두 사람은 광화문 근처 한 한정식 집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전자산업 부흥과 반도체, 그리고 정보통신 산업에 대해 밤늦도록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명 전 부총리기 전하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자.

△오명 박사=정보통신산업은 미래 산업의 핵입니다. 앞으로 몇 년이면 개인용 컴퓨터가 안방에서 서로 통신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더불어 통신산업, 반도체산업, 소프트웨어산업이 동시에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은 전쟁으로 인해 산업사회로의 진입이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하루빨리 서둘러 우리가 먼저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김 수석=좋습니다. 당장 무엇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까?

△오명 박사=우선 전화 적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온 국민이 편하고 저렴하게 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화는 통신의 기본입니다. 여기에 컴퓨터 등이 결합하면 새로운 정보산업이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통금시간이 가까워오자 헤어지면서 김 수석이 느닷없이 물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니 나와 생각이 같군요. 어떻습니까? 이왕이면 청와대에 와서 말씀하신 일들을 직접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직책은 약속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해 주겠습니다.”

한 통의 전화가 인연이 됐고 그것이 역사가 된 것이다.

오 박사는 그해 10월부터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2급 경제과학비서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가 담당한 분야는 과학기술과 전자공업, 체신업무, 방위산업 업무 등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