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만의 體認知]<139>발과 발레:발레는 아름답지만 발은 아름답지 않다!

발레리나 강수진과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 사진은 두 사람의 치열한 삶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 발 사진에는 발의 역사, 족적(足跡)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발레의 아름다움은 온몸의 무게를 발끝으로 견디면서 갈고닦은 고난과 시련의 산물에서 탄생한다.

남에게 보이는 아름다움은 남이 쉽게 볼 수 없는 앓음다움의 산물이다. 앓음다움은 앓고 난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다움에서 묻어나는 아름다움이다. 가시 없는 장미 없듯이 아픔 없는 아름다움도 없다. 아름다움은 앓고 난 사람이 보여주는 인간적 면모나 사람다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앓음다움`과 `아름다움`은 동격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갈고닦은 피와 땀의 흔적이 보여주는 상징적 증표다. 마네킹은 보이지만 마네킹을 아프게 하는 시침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천양희 시인의 `뒤편`이라는 시가 있다.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저 소리 뒤편에는/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뒤편의 아픔이 보이는 아름다움을 만들어간다. 아름다움은 저절로 탄생되지 않는다. 포장과 위장, 분장과 화장으로 아름다워진 얼굴에는 내면에서 숙성된 아름다운 진면목이 보이지 않는다. 가식과 허식으로 한순간 반짝 빛나는 찰나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그렇게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포장된 꾸밈과 위장된 가식에 환멸을 느끼고, 분장한 얼굴에 덧없음을 느끼며, 화장한 얼굴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앎에 환멸을 느끼고, 심각한 불편함과 함께 도덕적 분노를 느껴야 아름다운 지식을 창조할 수 있다.

기존의 앎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야 한다. 환멸 없이 환상 없고, 일탈 없이 해탈 없다! 환멸의 끝에 새로운 세계의 환상이 시작되고, 정상 궤도 이탈이나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끝에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리고 해탈의 경지에 접근할 수 있다.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010000@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