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는 그날 부슬비가 내렸다. 정혁 원장 추락 사고가 났던 지난 7월 6일 밤 얘기다. 폴리스 라인이 쳐진 자생식물사업단 3층 건물에는 현관 조명 하나만 덩그렇게 켜진 채 빗줄기를 뿌렸다. 지금도 그에 대한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예외 없이 첫 마디는 “연구나 하지 왜 기관장은 해 가지고…”라는 것이다. 올곧고 한없이 착한 사람이 왜 하필 기관장을 해서 그런 꼴을 당하느냐는 인식이 깔려 있는 말투다. 정혁 원장 사건을 역으로 되짚어보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 몇 가지를 유추해낼 수 있다. 뒤집으면 최소한 기관장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원인은 음해성 투서다. 사실 `아니면 말고`식 투서는 심한 말로 기관장을 `말려 죽인다`. 음해성 투서에 휘말린 사람은 대부분 진위와 관계없이 큰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투서자가 처벌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투서는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연구재단 통합 전 어느 기관장은 임명받자마자 `발본색원`이란 단어를 써가며 투서자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뿌리를 뽑지 못하고 도중하차했다. 지난해 또 다른 기관장은 공모 기간에 투서로 거의 반 죽다 살아났다.
정혁 원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관장 출마를 주위에서 부추겼다. 외부인이 기관장이 되는 걸 막기 위한 고육지책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기관장이 된 이후는 진이 다 빠지도록 KAIST와의 통합을 막았고, 체계 개편에 나서자 투서질이 시작됐다. 본래 생명연은 정부출연연구기관 가운데 투서가 많기로 악명이 높다.
정부부처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건이 터지면 공무원은 생리상 멀리 떨어져 책임질 것만을 강요한다. 시끄러운 상태는 자신에게 관리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KAIST 총장 건도 유사한 사례다. 한 연구회 기관장은 공무원에 무릎을 꿇기도 했다. 항공우주연구원장은 정부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그만뒀다. 정혁 원장도 모처로부터 사퇴 압박이 심했다는 얘기가 간간이 나왔다.
연구소 기업 시스템도 문제다. 연구소 기업이 만들어지면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고경영자(CEO)가 따로 있어도 원장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에게 이 문제에 대책을 세우라고 하면 책임 피할 방법만 연구할 게 뻔하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선 안 된다. 차제에 재발 방지를 위한 `정혁법`을 제안한다. 정부부처 인사 불개입, 연구개발(R&D) 기관장 임기 보장, 기관장 재량권 확대(융통성 있는 기관 경영 보장)의 3대 원칙을 핵심으로 하는 그런 법을 추진해야 한다.
박희범 전국취재 부장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