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휴대폰·TV·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주력 정보기술(IT)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해외에서 한국산 제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하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한국 기업은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빠르게 성장해왔다. 최근 일부 기업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 최초와 최고 제품을 만들어내는 `퍼스트 무버`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러나 빠른 성장 속도에 비해 질적 도약을 뒷받침할 만한 인식 전환은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 경쟁 기업의 기술을 모방하고 도용하는 것에 도덕 불감증인 것이 대표적이다.
국내 전자업계 1, 2위 기업인 삼성과 LG가 차세대 미래 디스플레이 기술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핵심 기술 유출을 놓고 일전을 벌이고 있다. 또 효성에서 퇴직한 임원이 LS산전으로 옮겨간 뒤 두 기업 간에 기술 유출을 두고 최고경영자(CEO)까지 나서 설전을 벌였다.
해외 기술 유출 사례도 빈번해 삼성, LG의 OLED 기술이 해외 경쟁 기업이나 협력 업체를 거쳐 빠져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엔씨소프트 인기 온라인게임 `리지니` 기술은 일본 업체로 유출돼 재판을 거쳐 배상 판결까지 받았다.
이 같은 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술 유출을 대하는 우리 기업의 안이한 태도다. 기술 유출 혐의를 받은 회사는 하나같이 업계 관행이라고 항변한다. 기술 유출 피해 당사자인 기업도 평소 기술 윤리 교육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일은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다. 기업이 지닌 기술은 아무리 사소해도 지식재산권으로 보호받아야 하며 인력 역시 자원으로 함께 관리돼야 한다.
솜방망이 처벌도 안이한 자세를 부채질한다. 지난 2006∼2010년 5년간 국내에서 경쟁사의 기술을 빼내려다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927명 가운데 4.5%인 42명에게만 실형이 선고됐다. 가벼운 처벌로는 기업이 수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만든 소중한 기술을 지켜내기 힘들다.
최근 정치권에서도 산업 스파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7월 한 달에만 산업기술 유출방지법 개정 발의가 세 건 있었다. 발의안은 산업 스파이의 신상을 공개하거나 처벌 강도를 최고 `징역 7년 이상 또는 벌금 15억원 이하`로 정해 법정최고형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외국의 처벌 규정은 한국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난 2008년 인텔에서 AMD로 이직한 연구원이 2억달러가 넘는 가치를 지닌 내부 보고서를 빼낸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에 적발돼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미 법조계에서는 최고 20년형 선고를 예상한다.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직원은 인텔의 기술을 AMD에 건넨 혐의만으로도 패가망신할 지경에 몰렸다.
한국 IT 업계가 퍼스트 무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기업 기술 보호책이 마련돼야 한다. 경쟁에서 관대함은 포기하고 좀 더 엄격한 자세와 관리방법을 갖춰야 한다. 불순한 의도로 경제·산업 환경을 손상하는 어떤 주체에게도 가혹할 정도의 룰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업은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쌓은 노하우가 쉽게 경쟁사에 넘어갈 수 없도록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 퍼스트 무버가 된다는 것은 경쟁자가 따라오기 어려운 격차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퍼스트 무버의 필요 조건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임윤철 기술과가치 대표·전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ynchlim@technovalu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