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금융 중심지, 미국의 경제수도인 뉴욕. 1970∼1980년대만 해도 뉴욕은 뒤죽박죽 낙서 천지였다. 건물 외벽과 교각은 낙서꾼의 도화지였다. 낙서 대부분은 스프레이로 그린 그라피티였다. 1980년대 초 뉴욕 지하철 5956량 가운데 95% 이상이 낙서로 몸살을 앓았다. 승객에게 재미를 주고자 가볍게 시작한 열차 외벽 그라피티였지만 결과는 혼돈이었다.
수송국과 민간단체가 낙서추방캠페인에 나섰다. 말들이 많았다. `도시미관을 위해 낙서를 추방하자` `관광객이 낙서를 보려고 뉴욕을 찾으니 그 또한 관광상품이다` 등이다. 낙서도 대중예술이라던 예술가의 주장은 낙서와 도시쓰레기를 동급으로 보는 집단의 목소리에 묻혔다. 1988년 말 지하철 객차 그라피티는 사라졌다.
1980년대 초 뉴욕의 전문 낙서꾼 수는 약 2000명. 스프레이를 숨기고 다니며 공공시설 외벽에 경쟁적으로 낙서해댄 통에 사회악 취급받던 그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철칙이 하나 있었다. 절대 남의 작품 위에 덧칠하지 않는 것. 낙서 철학이다.
낙서는 인류사와 함께한다. 1만 수천년 전 알타미라 동굴부터 오늘날 책상이나 화장실 벽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있다. 후손에 전할 기록으로, 세상 부조리에 대한 풍자로, 때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음란화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잊고 살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도 한때는 낙서꾼이었다.
시대 상황에 따라 낙서도 변했다. 1973년 반피득 연세대 교수는 3년간 교내 낙서를 모아 분석했다. 1970년대 대학가 낙서를 삶과 죽음, 사랑과 이성, 금연금주 등의 인생사, 연정사, 생활사로 요약했다. 광주항쟁 등의 애사가 있었던 1980년대에는 정치나 사회개혁 구호가 대학 캠퍼스를 가득 채웠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평화적 정권교체 등 굵직한 사건이 있었던 1990년대 상황은 달랐다. 개혁이나 통일 같은 정치색 짙은 낙서보다는 등록금 인상이나 취업문제 같은 현실 문제를 다뤘다. 1999년 대학생 세 명이 1년간 낙서 1000여편을 모아 쓴 책 `스무 살의 슬픈 우리`는 당시 낙서상을 그렇게 정리했다.
캠퍼스 환경이 개선되면서 대학 내 낙서 공간도 대부분 사라졌다. 또 다른 변화다. 그래서 세 명의 대학생 저자는 화장실이나 책상이 아닌 PC통신과 인터넷에서 낙서를 모아야 했다. 낙서로 시대상을 읽으려던 이들의 발상이 재미나다. 여담이지만 책의 주저자인 이호준은 훗날 기자가 돼 전자신문에서 일한다.
낙서는 시대 고통의 산물이자 문화적 배설이다. 때로는 촌철살인의 시(詩)가 되기도 한다. 그 형태가 동굴 벽화든 지하철 객차 그라피티나 화장실 문짝 짤막한 글이든 모두 시대상을 반영한 창작물이다. 타 종교를 폄훼하기 위해 법당 탱화에 욕설을 적는 종교인이나 서대문 일제 성노예 피해 소녀상에 독도를 일본땅이라 적는 일본 극우정치인의 행위는 낙서 축에 못 낀다. 남의 낙서에 덧칠하지 않는 낙서꾼의 기본도 갖추지 않은 저급한 쓰레기이자 오염(汚染) 행위다.
기억에 남는 낙서 하나가 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도시 미화에 과할 만큼 열을 올리던 1988년 봄의 기억이다. 서울 성북동 한옥촌 담벼락에 낙서하다 인기척에 놀라 달아난 초등학생 둘이 남긴 글, 녀석들의 순수함에 웃음이 절로 나던 그 낙서, `김일성 바보, 김정일 똥개`. 지금의 초등학생은 도저히 이해 못 할 내용이지만 당시 반공교육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준 그 글. 30대 중반이 돼 있을 그들은 지금도 낙서 중일 게다. 팍팍한 삶의 모습을 담벼락이 아닌 다이어리나 인터넷에.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