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부는 1994년 12월 기존 체신부를 확대 개편해 출범했다. 김영삼 정부의 대대적인 조직개편의 일환으로 빛을 보게 됐다.
정보통신(IT) 전문부처 모델을 제시한 정통부는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도약하는 디딤돌이 됐다. 전전자교환기 대중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통신 세계 최초 서비스, 초고속인터넷망 구축 등 굵직굵직한 국책사업을 추진했다. IT를 대한민국 브랜드로 만드는 산파 역할을 했다.
한국 정통부를 벤치마킹해 정보통신 전담부서를 둔 나라는 29개에 달한다. 정통부와 같은 독임제 조직형태를 채택한 나라도 30개국을 넘는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정통부를 전격 해체하면서 정작 한국의 IT 전담부처는 13년 역사를 끝으로 사라졌다.
정통부의 출범은 다소 파격적인 정부 조직개편으로 이뤄졌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정책의 일환으로 정보통신부를 신설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조직개편 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과 만남에서 “세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조금만 경쟁에 뒤지면 영원히 낙오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컴퓨터와 정보통신, 그리고 변화와 개혁에 정부가 적극 나섰다”며 정통부 신설 배경을 설명했다.
경상현 정통부 초대 장관도 언론 인터뷰에서 “정통부는 대통령이 제시한 세계화 개혁을 구체화하는 가장 혁신적인 수단”이라며 “정통부 발족으로 21세기 고도 정보화 사회에 대비해 국가 정보화 촉진과 정보통신 산업 육성을 일관성 있게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정통부는 이를 반영하듯 기존 체신부 기능에 △정보통신 산업 육성 △전파관리 △통신방송 기술개발 등의 업무를 일원화했다. 그동안 과학기술처, 상공자원부, 공보처 등으로 분산돼 있던 정보통신 관련 기능이 흡수·통합됐다. 정보화 정책 총괄기관으로서 정보통신의 수요 정책과 공급 정책의 균형도 추진했다. 정보화촉진기본법에 따라 1996년부터 제1차 정보화기본계획을 수립 집행하고, 초고속정보통신망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정통부 출범에 맞춰 한국에는 때마침 정보화 열풍이 사회 전반에 확산됐다.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서는 앞서가자`는 구호가 요란했다.
정통부는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하듯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와 결합해 출범 초 뚜렷한 업적을 보였다. `1가구 2전화 시대`를 가능하게 한 전전자교환기(TDX)를 빠른 속도로 상용화했다. TDX는 가정 내 전화기 대중화를 일궈 우리나라가 통신강국으로 도약하는 첫 번째 발판을 마련했다.
정통부는 1996년 CDMA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CDMA 첫 상용화는 통신산업은 물론이고 국내 휴대폰 기업의 세계적 도약을 이끈 역사적 사건으로 꼽혔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한국 휴대폰업체는 CDMA 첫 상용화의 결실을 바탕으로 개발한 CDMA폰을 전 세계에 판매하면서 휴대폰 분야 글로벌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CDMA의 성공은 3세대(G) 이동통신, 4G 와이브로와 롱텀에벌루션(LTE)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무선 통신환경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통부 주도의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 역시 빛나는 업적이었다. 정통부는 1999년 비대칭형 디지털 가입자망(ADSL) 서비스 제공에 나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속인터넷 인프라가 구축됐다.
초고속인터넷 전국망 구축은 네이버, 다음, 엔씨소프트, 넥슨 등 인터넷 벤처 신화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값싸고 빠른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집과 사무실, 학교 등에 갖춰지면서 우리나라 인터넷 산업도 급속히 발달했다.
하지만 정통부는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여러 과오를 남기며 존폐론에 휩싸였다. 전담부처의 강력한 추진력이 오히려 과오를 불러오는 사례가 잇따랐다.
독자 무선 플랫폼 `위피(WIPI)`와 4세대 이동통신 와이브로의 실패가 대표적이었다. 위피를 강조하면서 스마트폰 도입이 늦어져 한국이 세계에서 고립됐다는 `갈라파고스 논란`을 불러왔다. 와이브로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도 국내 대중화가 늦어지면서 LTE와 경쟁에서 뒤처졌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 시절 산업자원부, 행정자치부, 문화관광부 등 다른 부처와 번번이 대립한 영역다툼이 부각되면서 정통부는 13년 만에 해체라는 비운을 맞았다.
정통부는 출범 초반에는 비교적 성공했으나 2000년대 후반 주요 정책이 실패하면서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통부를 해체한 이명박 정부에서 세계 IT 경쟁력이 급추락하면서 새로운 IT 전담부처 요구가 다시 비등했다. 스마트 혁명으로 세계 IT 시장이 급변하면서 콘텐츠·플랫폼·네트워크·단말기 등으로 이어지는 스마트 생태계를 관장할 새로운 IT 전담부처의 부활이 시대정신으로 부각됐다.
◆정통부 산파역 윤동윤 전 장관과 경상현 정통부 초대 장관
정통부 출범에는 윤동윤 전 체신부 장관이 사실상 산파역을 했다. 체신부 마지막 장관인 그는 서울대 법대 졸업 후 행정고시 3회로 체신부에서 처음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과장, 국장, 실장, 차관으로 승승장구하다 문민정부에서 장관으로 발탁되는 영광을 누렸다. 체신부 관료로 한 계단씩 승진해 장관까지 오른 사람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1994년 12월 정부조직 개편을 앞두고 정보통신에 대한 해박한 이론과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정보통신 신설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체신부 장관 재임시절 통신학회, 전자공학회 등의 정보통신 관련 학술대회도 대대적으로 지원해 사회 전반에 정보통신 산업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는 재임 중 CDMA 개발을 성공시키면서 향후 정통부가 비상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윤 전 장관이 CDMA를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우리나라 통신은 외국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윤 전 장관의 CDMA 개발 업적을 이어받은 정통부는 세계 최초로 CDMA를 상용화하면서 우리나라를 `IT 강국` `휴대폰 강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 때문에 퇴임 후 `성공한 장관`으로 평가받았다. 신동아는 그를 “정통부를 발족시킬 만큼 통신산업 발전에 많은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윤 전 장관의 바통을 이어받아 정통부를 초기에 뿌리내리게 한 사람은 경상현 초대 장관이었다. 그는 윤 전 장관 아래에서 체신부 차관을 지내다 깜짝 발탁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미국 MIT 공학박사로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한국전산원장 등을 역임한 과학자 출신이었다. 전문부처로 출범하는 정통부에 걸맞은 전문가였다.
그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8년여간 소장으로 재임하면서 전전자교환기, 4메가 D램과 중형 컴퓨터 타이컴1,11, CDMA이동통신시스템개발 성공 등의 획기적인 성과를 거뒀다. 그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IT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놓았다.
경 전 장관은 과학자 출신답게 신기술 개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1996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DMA 기술 개발을 직접 챙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결국 CDMA 첫 상용화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그는 화려한 정통부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는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 시외전화사업 경쟁체제 도입 등 선이 굵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한국 통신시장에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아시아 태평양 통신협력 사업도 추진해 한국 IT가 세계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초석도 놓았다. 정통부 출범을 놓고 윤동윤 전 장관이 이끌었다면, 경상현 전 장관은 그 기반 위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비옥한 텃밭을 가꾸었다.
[표] 정보통신부 연혁
1884. 4. 근대우정 시작
1885. 8. 전신전화 시작
1948. 11. 체신부(정통부 모태) 발족
1982. 1. 한국전기통신공사를 분리
1983. 12. 체신금융국 신설
1990. 12. 정보통신국 신설
1991. 11. 통신정책실 신설
1994. 12.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
2000. 7. 우정사업본부 신설
2006. 4. SW단 신설 등 5본부 3단 5관 36팀으로 개편
2008. 1. 정통부 폐지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