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8일, 미국 방식과 유럽 방식을 놓고 4년을 끌어온 디지털TV 전송방식 논란이 마침내 최종 합의를 이뤘다.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노성대 방송위원회 위원장, 정연주 KBS 사장, 신학림 언론노조 위원장이 서울 홀리데이인서울 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고정식 디지털TV 전송방식을 미국방식인 `ATSC-8VSB`로 하기로 합의했다.
또 이동 DTV 전송방식으로 현 지상파DMB에 이어 유럽식 차세대 전송방식인 DVB-H 도입을 검토하고, 정통부가 관련기술 개발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구체적인 합의 내용은 △별도 비교시험 없이 2001년 실시한 MBC 비교시험 재검증으로 대체 △고정수신은 기존 미국 ATSC로 하고, 별도 이동수신 매체 도입 △이동수신 매체로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우선 상용화 △DVB-H 도입 여부 검증을 위한 프로젝트 공동수행 등이다.
긴 논란을 끝내고 합의에 이르기까지 정보통신부·방송위원회·KBS·전국언론노조가 참여한 DTV필드테스트추진위가 중심이 됐다. 추진위는 2004년 1월 말 DTV 전송방식 논란을 조기 종식하기 위해 구성했다. 추진위 출범 후 수십 차례 회의를 했지만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동수신 매체로 지상파DMB를 적극 추진 중인 KBS가 정통부와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상황이 변화됐다.
미국 방식의 단점을 개선한 기술이 나오고, 이제 와서 전송방식을 변경하면 피해가 커질 것이라는 여론도 미국 방식에 힘을 실어줬다. 결국 수세에 몰린 언론노조는 고정수신 방식 변경을 주장하는 대신 휴대이동수신으로 DVB-H를 도입해야 한다고 방침을 바꿨다. 이에 정통부도 지상파DMB를 우선 상용화하고 DVB―H 도입도 적극 검토하자는 쪽으로 정리하면서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당초 정통부는 사회적 합의 필요성을 외면했지만, 2004년 초 노무현 대통령이 합리적 프로세스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방송위도 처음에는 논란 자체를 무시했지만, 2003년 5월 제2기 방송위가 출범하면서 재검토 필요성을 강조했다. 방송위는 2004년 1월 광역시 소재 방송사의 디지털 전환을 잠정 중단했는데, 결과적으로 논의 속도가 빨라지는 계기가 됐다.
전송방식 논란에 나서지 않던 KBS는 지상파DMB 도입을 추진하는 과정에 DVB-H 도입을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정통부 의견에 동조했다. 언론노조는 비교시험 등 전송방식 재검토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미국 방식 성능이 개선되고 일본과 전파월경 문제 등이 제기되면서 유럽 방식에 대한 의견을 접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합의에 이른 후 추진위 4인 대표는 4년간 끌어온 DTV 전송방식 문제제기가 사회적 논의로 이어졌고, 디지털TV 전송방식에 대한 이해증진, 시청자 복지, 이동수신과 휴대이동수신 필요성 인식 제고 등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또 미국 방식 수신율 개선을 위한 5세대칩 개발 등 관련 기술과 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합의한 내용을 보면 DVB-H 도입검토 외에는 기존 정부정책과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결국 4년여간의 논쟁이 소모적이었음을 보여준 셈이다. 합의에 이르기까지 정통부·방송위·KBS·언론노조 등은 수차례 주장을 바꿨지만 결국에는 처음 주장으로 되돌아왔다.
언론노조는 4년간의 문제제기로 국가 디지털방송 전환정책에 차질을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전송방식 변경 시 우려되는 경제적 피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광역시 소재 지상파 방송사의 DTV 전환일정을 잠정 중단한 방송위에 대한 문제제기도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지상파 디지털TV 전송방식 논란이 마무리되면서 2004년 1월 이후 6개월 정도 중단된 지상파TV의 디지털 전환 일정이 재개됐다. 지상파DMB 도입도 탄력이 붙었다.
특히 수개월 앞으로 다가온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디지털 전환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방송위는 중단했던 광역시 소재 방송사의 디지털 방송 일정을 서두르는 한편, 2004년 안으로 방송을 시작해야 하는 도청 소재지 방송사 디지털 전환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정통부는 지상파DTV 난시청 해소를 위한 수신환경 개선, 채널 간 혼신방지 등을 위해 예산지원 등 정책적 지원방안을 마련했다. 지상파DMB도 종합적인 판단을 거쳐 상용화 시기를 결정하기로 했다.
길었던 전송방식 논란 종식에 가전업계도 반색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가전업계는 디지털 방송방식이 미국식으로 확정되자 일제히 환영했다. 디지털 방송방식 논쟁 종식으로 그동안 디지털TV 구입을 망설여 오던 소비자 구매가 늘어나 디지털TV 보급이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됐기 때문이다.
◆ 라봉하 정보통신부 방송위성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융합정책관)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미국과 유럽 방식 각각의 장단점이 다 있었기 때문에 기술 논쟁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대타협이 필요했고, 서로 주장을 밝히고 양보하면서 합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04년 7월, 4년간의 긴 논쟁을 끝내고 디지털TV 전송방식을 확정했을 당시 상황을 정보통신부에서 실무를 맡았던 라봉하 방송통신위원회 융합정책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정통부와 방송위, KBS, 언론조노 등 논의에 참여하는 이해 당사자들이 각자의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어 타결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기술 검증을 위해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수신율, 이동 중 수신 등 다양한 테스트를 실시해도 결과 해석은 엇갈렸기 때문이다.
라 국장은 “4년을 끌면서 디지털 전환 계획이 지연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면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합의가 필요했고, 이해관계자들에게 터놓고 논의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긴 논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어느 한 방식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통부는 미국 방식에 대한 설득을 했다. 이미 수년 동안 미국 방식으로 디지털 방송을 해왔기 때문에 연속성과 산업 측면에서 경쟁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부분을 얘기했다. 북미 TV 수상기 시장에서 국내 가전업체들이 새로운 판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04년 6월에 미국 방식의 기술적인 약점들이 개선됐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합의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라 국장은 “미국 방식 약점을 얘기하며 유럽 방식의 우수성을 주장하던 미국 방송사 싱클레어가 제니스(LG전자 미국 자회사)와 함께 5세대 ATSC 칩을 이용한 수신실험에서 `현저한 성능개선`을 이뤘다고 발표했다”면서 “언론노조가 주장하던 부분을 이 발표가 해결해주면서 합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싱클레어는 “5세대 ATSC 수신칩이 반사파가 혼재돼 있거나, 반사파가 방송신호보다 강한 상황에서도 방송신호를 수신할 수 있는 성능개선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싱클레어가 발표한 내용은 전송방식 기술이 약점을 보완하며 진화해갈 수 있다는 정통부 주장을 입증했다. 또 현 상황에서 기술 진화 방향을 예측하며 채택하는 것보다 선택한 기술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렸다.
라 국장은 “언론노조가 고정수신에서 미국 방식을 택하는 것을 인정하며 양보에 이르게 됐다”면서 “정통부도 미국방식의 또 다른 약점인 이동수신을 보완하기 위해 지상파DMB와 함께 유럽식인 DVB-H 도입을 함께 검토하기로 하며 한발 물러섰다”고 전했다.
합의를 이룰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4년간의 논란이 소모적이지 않고, 성과가 있었다는 부분을 인정한 데 있다.
합의문 초안을 작성한 라 국장은 “합의문 초안에 지난 4년간의 논쟁이 헛되지 않았다는 부분을 강조했다”면서 “부족한 기술 논쟁으로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고, 디지털 전환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표] 디지털TV 전송방식 논란 일지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