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 1일 초고속인터넷 ADSL(Asymmetric Digital Subscriber Line: 비대칭형 디지털 가입자망)이 국내에서 개통됐다.
이날 김대중 대통령과 신윤식 하나로통신 사장의 영상통화는 한국 정보통신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신윤식 전 하나로통신 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대통령이 당일 외무부에서 예정돼 있던 업무보고를 며칠 전 정보통신부로 변경했어요. ADSL이 개통된 것에 그만큼 의미를 뒀다는 뜻이죠. 사장실에서 몇 분간 대통령과 영상통화로 축하와 덕담을 주고받았습니다.”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은 기존 구리 전화선을 통해 일반 음성통화는 물론이고 데이터 통신을 고속으로 이용할 수 있는 ADSL을 도입해 1999년 4월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후 초고속인터넷은 더 이상 프리미엄이 아닌 대중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집집마다 초고속인터넷이 안 깔린 곳이 없을 정도였다. 전국에 깔린 초고속인터넷을 타고 네이버, 다음 등 포털사와 온라인게임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ADSL 개통은 하나로통신의 생존 본능에서 출발했다. 1997년 3월 출범한 하나로통신은 곧바로 시내전화 사업만으로 KT와 경쟁할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했다. 통신시장 경쟁 활성화를 모토로 하나로통신이 만들어졌지만 애초에 기존 사업자인 KT의 상대가 되긴 역부족이었다.
KT는 앞선 네트워크 설비를 내세워 전화 사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통화 품질이나 서비스에서 후발주자가 파고들어갈 허점이 거의 없었다.
생존을 고민하던 하나로통신은 해외에서 답을 찾기로 한다. 하나로통신은 신윤식 사장의 주도하에 1997년 미국, 유럽, 일본 등에 인력을 파견했다. 회사의 존폐를 짊어진 시찰단은 벨, AT&T, INC, 벨코어, NTT, TTnet, BT, C&W를 샅샅이 뒤졌다.
통신 선진국을 다녀온 온 그들의 결론은 하나로 모였다. `ADSL을 먼저 도입하면 승산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글로벌 통신사들은 예외 없이 ADSL을 도입하거나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내부 반대에 부딪혔다.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확실한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ADSL 모뎀 가격만 60만원이 넘을 정도로 초기 비용이 컸다. 전국 가정에 ADSL을 보급하려면 하나로통신 역량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세계적으로 ADSL 전국망을 갖춘 나라가 없다는 것도 약점이었다. 기술을 개발됐지만 제대로 상용화한 사례가 없었다. 한마디로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신 사장은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밀어붙였다. 그는 ADSL이 KT와 경쟁할 수 있는 카드라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신 사장은 경영진에게 2년 안에 모뎀 가격을 20만원 이하로 내릴 수 있다고 공언했다. 공수표가 아니었다. 데이콤 사장 시절에 PC통신 `천리안`의 성공을 이끈 경험이 바탕이 됐다.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시장 경쟁으로 모뎀 공급가를 낮추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다.
내부 반대를 넘자 더 큰 산이 다가왔다. 정부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지역 단위별로 대기업을 선정해 초고속망 구축 사업을 실시하려던 차였다. 이미 사업공고까지 나온 상태였다.
신 사장은 강봉균 정보통신부 장관을 상대로 설득에 나섰다. 음성과 데이터 사업자를 따로 두는 당시 계획은 신 사장이 봤을 때 현실적이지 않았다. 초고속망인 ADSL만 마련되면 음성은 그 위에 얹기만 하면 됐다.
신 사장은 `설비 구축은 하나로통신 같은 통신사가, 서비스는 대기업이 맡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기업에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거듭된 요청에 마침내 큰 산이 움직였다. 신 사장은 정통부 확대간부회의에 참여해 ADSL 도입 당위성을 역설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하나로통신은 1999년 4월 1일을 상용서비스 개시일로 잡았다. 신 사장은 모뎀 국산화를 위해 국내 100여개 업체에 500억원을 지원했다. 1998년 8월 서울 오금동 현대아파트에 장비를 설치해 일부 가입자를 대상으로 시험서비스를 시작했다.
시범사업 결과 속도와 품질은 예상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남은 문제는 가격이었다. 정통부는 4만원 이하로 요금을 책정해야 초고속인터넷 활성화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냈다. 최종 가격은 2만8000원으로 정해졌다.
운명의 4월 1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ADSL 개통을 기념해 대통령과 영상통화를 한다는 방침이 정해지자 하나로통신은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만의 하나 장애가 발생하면 지금까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4월 1일 예정된 국정개혁보고가 끝나자 하나로통신은 영상통화를 위해 정통부로 신호를 보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신호를 보내자 그제야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하나로통신의 서비스 개통을 축하합니다.”
◆ 신윤식 전 하나로통신 회장
“나는 ADSL. 그것이 하나로통신의 모토였습니다.”
신윤식 전 하나로통신 회장은 ADSL을 `빠름`과 `차별화`로 정의했다. `나는 ADSL`이라는 당시 광고 카피는 이런 성격을 잘 담아냈다. 하늘을 나는 듯 빠른 속도 그리고 너와는 다른 서비스를 받는 `나`를 내세워 소비자들에게 접근했다.
ADSL이 상용화됐던 1999년은 우리나라가 국제금융위기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직장을 잃은 자영업자들은 앞다퉈 PC방을 창업했다.
동네마다 최소 두세 군데의 PC방이 들어섰고 청소년들은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에 열중했다. 부모가 아이를 찾으러 PC방을 전전하는 것이 사회문제가 되던 때였다. 이런 환경은 초고속인터넷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
“집에서도 PC방 못지않은 인터넷 서비스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마케팅을 했고 성공을 거뒀습니다.”
신 전 회장은 “하나로통신이 ADSL을 도입하지 않았더라도 1년 뒤 누군가 시작했을 것”이라며 “ADSL은 상용화 그 자체가 아니라 통신시장에 건강한 경쟁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로통신이 아닌 KT가 이 서비스를 시작했다면 경쟁구도가 무너져 단기간에 초고속인터넷이 활성화되지는 못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KT는 하나로통신이 ADSL을 도입한 지 몇 달 후 급히 이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나로통신이 아파트 등 대규모 주택단지를 위주로 사업을 전개한 반면에 KT는 우수한 인프라를 앞세워 개인 주택 같은 소규모 주거지를 공략했다.
신 전 회장은 “ADSL을 시작하자마자 웨이팅(개통 대기수요)이 엄청났다”며 “하나로통신은 우선 급한 대로 300가구 이상 대규모 단지부터 개통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나로통신이 미처 담당하지 못한 소규모 주거단지를 KT가 공략하기 시작하며 초고속인터넷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신 전 회장은 “하나로통신으로서는 아쉽지만 국가적으로 봤을 때는 잘된 일”이라고 평가했다.
ADSL은 새로운 생태계도 만들어냈다. 초고속인터넷이 대중화되며 온라인게임 등 새로운 비즈니스가 활성화됐다. 서비스뿐 아니라 인프라에서도 국산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로통신은 ADSL 모뎀을 국산화한 데 그치지 않고 대형교환기도 대기업과 협력해 개발에 성공했다. 대당 30억원에 이르는 교환기를 국산화한 것은 정보통신기술(ICT)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신 회장은 “ADSL의 성공적인 도입은 건전한 경쟁으로 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정부와 사업자의 공통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앞을 내다본 시장의 안목과 이를 믿고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정부 최고지도자의 결단이 산업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일깨워준 사례”라고 강조했다.
[표] 하나로통신 ADSL 개통 연표
1997년 3월 하나로통신 출범
1997년 11월 하나로통신 해외시찰단 파견
1998년 8월 ADSL 시범서비스 시작
1999년 4월 ADSL 상용서비스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