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42] 이동통신시장 경쟁체제 본궤도 <1996년 6월>

1994년 체신부에서 확대·개편된 정보통신부는 전기통신기본법과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 새로운 분류 체계를 마련했다. 이른바 제2차 통신사업 구조개편으로, 개인휴대통신(PCS)서비스 신규 허가 등 통신 부문별 경쟁을 확대하는 게 골자였다.

 [100대 사건_042] 이동통신시장 경쟁체제 본궤도 <1996년 6월>

1996년 3월 7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LG그룹 PCS사업설명회`에서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이 "PCS사업 운영을 맡을 5000억원 규모의 LG텔레콤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1996년 3월 7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LG그룹 PCS사업설명회`에서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이 "PCS사업 운영을 맡을 5000억원 규모의 LG텔레콤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정통부는 1995년 7월 `통신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본 정책 방향`을 발표, PCS 사업자 선정에 본격 착수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일컫는 PCS 사업권 수주를 위해 대기업은 `적과의 동침`을 불사하며 합종연횡을 거듭했다.

LG그룹이 1995년 PCS사업 참여를 선언한 데 이어 1996년 초 현대, 삼성, 대우, 한솔, 금호, 효성, 데이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등이 속속 출사표를 던져 PCS 수주전은 재벌의 `통신대전`으로 비화됐다.

재원조달과 기술축적 등 사업수행 역량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던 현대와 삼성, LG, 대우 4대 재벌은 석 장의 PCS사업권 가운데 한국통신에 할당된 한 장을 제외한 나머지 두 장을 놓고 경합, 사실상 경쟁률은 2 대 1로 좁혀진 듯 보였다.

하지만 정통부가 1996년 3월 사업권 배정방식을 △한국통신 △통신장비 제조업체군 △통신장비 비(非)제조업체군으로 세분, 각 군에 사업권을 한 장씩 할당하는 것으로 수정하자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4대 재벌은 한 장의 사업권을 두고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됐다. 반면에 사업권 획득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던 한솔 등 중견그룹과 중소기업협동중앙회는 쾌재를 불렀다.

LG는 단독응찰 방침을 고수했으며 재계의 숙적인 현대와 삼성은 대우를 배제하고 제휴, `에버넷`이라는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LG를 꺾기 위한 현대-삼성 간 `적과의 동침`은 화젯거리가 됐다.

이에 따라 통신장비 제조업체군에서는 현대·삼성-LG가 경합을 벌였고, 통신장비 비제조업체군에서는 금호·효성-한솔·데이콤-기협중앙회 컨소시엄 등 3개 업체가 경쟁했다.

금호·효성, 한솔-데이코, 기협중앙회가 3파전을 벌인 통신장비 비제조업체군에서는 한솔-데이콤 진영의 우세가 점쳐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한솔제지 최고경영자가 공정래위원회 독점국장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는 사건이 터졌다. 앞서 정통부가 심사항목에 사회적 공익성과 기업 도덕성을 포함하겠다고 밝힌 상황에서 불거진 사건으로 한솔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는 듯했다.

1996년 6월10일 당시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이 PCS사업자 선정을 발표하고 있다.
1996년 6월10일 당시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이 PCS사업자 선정을 발표하고 있다.

1996년 6월 10일 정통부는 PCS 사업자로 한국통신을 비롯, 통신장비군에서 LG를, 비장비군에서 한솔을 PCS 사업자로 선정했다.

한국통신이 PCS 사업권을 갖게 된 데는 통신시장 개방에 대비한 국내 통신 대표 사업자 육성과 기간통신사업자의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명분에서 비롯됐다.

최종 사업자 선정 발표 이후 현대·삼성은 “결과에는 승복하지만 심사의 공정성에 의문점이 많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기협중앙회는 승복불가 방침을 취했다. 반면에 LG와 한솔은 “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 사업권을 따냈다”는 주장을 거듭 밝혔다.

정통부는 1997년 1월 PCS 신규사업자의 식별번호로 한국통신프리텔 `016`, 한솔PCS `018`, LG텔레콤 `019`로 부여했다.

이에 앞서 PCS 3사는 번호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PCS 사업자에게 018X계열의 네 자리 식별번호를 부여하는 방안이 제기되자 기존 이동통신 사업자에 비해 불리하다며 세 자리 수로 해줄 것을 정통부에 강력하게 요청했다.

정통부가 PCS사업자에게 기존 이동전화(011·017)와 같은 세 자리 식별번호를 부여한 것은 1998년 통신시장개방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신규사업자가 조기에 경쟁력을 확보하고 기존 사업자(SK텔레콤·신세기이동통신)와 공정경쟁 환경을 조성해야한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결과다. PCS 3사 간의 식별번호배정은 각자 희망하는 번호가 달라 별다른 문제없이 타협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단군 이래 최대의 이권사업으로 회자된 PCS사업자 선정은 이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7년 10월 한국통신프리텔(KTF), 한솔PCS(한솔엠닷컴으로 사명변경), LG텔레콤 등 PCS 사업자 3개가 신규로 시장에 진입해 기존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으로 사명 변경), 신세기통신과 함께 총 5개의 사업자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됐다.

PCS 3사 출현은 이동통신 요금 인하, 서비스 품질 향상, 휴대폰 산업 발전 등 효과를 비롯, 이동통신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표] PCS 사업자 선정 일지

◆`CDMA` 선택

1995년 10월 20일 정보통신부는 PCS 기술방식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단일표준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PCS 무선접속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정보통신부는 “경제성과 기술발전 가능성, 장래성 등 측면에서 CDMA 방식이 시분할다중접속(TDMA)보다 우수한 것으로 판단, 국내 PCS방식을 CDMA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또 CDMA와 TDMA의 복수표준안에 대해 “국내기술개발능력 및 인력, 개발기간 등을 감안할 때 두 방식을 모두 채택하게 되면 그간 개발한 국내 CDMA기술이 사장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정통부의 선택은 우리나라가 CDMA 종주국으로, 세계 IT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분수령이 됐다.

하지만 정통부는 최종 선택에 앞서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PCS 기술표준을 놓고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부처 간, 기업 간 단일표준인지 혹은 복수표준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다.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은 PCS 무선접속 방식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한국통신은 “CDMA보다 TDMA 방식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한국이동통신은 “국책과제로 선정돼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들인 CDMA 기술을 국가표준으로 삼는 게 당연하다”고 맞섰다.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이 기술방식을 놓고 갈리자 장비업체와 단말기 제조업체 등까지 논란에 가세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현대전자, 맥슨 등은 CDMA 방식을 주장했고 대우통신 한화전자정보통신 등은 TDMA 방식을 선호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CDMA 방식을 단일표준으로 결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CDMA 상용화 이전인 만큼 시스템 안정성이나 경제성 등에 우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통부는 국익을 최우선 가치로 PCS 무선접속 방식을 CDMA 단일표준으로 확정한 것이었다. 정통부가 PCS 접속방식을 CDMA로 단일화한 것은 통화품질이 우수하고 가입자 수용용량이 크며 서비스 제공영역이 넓어 경제적으로 통신망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복수표준을 선택하게 되면 한정된 국내 개발자원이 분산돼 관련 기술의 적기 개발이 불가능하며 이미 개발한 CDMA기술마저도 사장될 우려가 있다는 점도 감안한 것이다.

정통부 발표 이후 한국통신은 전격적으로 TDMA방식을 포기하고 CDMA방식의 PCS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김원배기자 adolf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