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크라우드펀딩

스마트폰 화면에 대고 터치 자판을 누르는 느낌은 좀처럼 익숙하지 않다. 기계식 자판을 두드릴 때 기분 좋게 착 감기는 그런 느낌은 모바일 시대 도래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는 걸까. 일반 기업이 스마트폰에서 쓰는 기계식 자판을 만들 이유는 없다. 시장 규모나 비용을 따지면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터치스크린 스마트폰에서 기계식 자판을 쓰고 싶은 사람의 수요를 시장에서 맞춰 줄 방법은 찾기 힘들었다.

[이머징 이슈] 크라우드펀딩

하지만 다수가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에 소액을 투자하는 `크라우드펀딩`이 확산되면서 얘기는 달라졌다. 미국 시애틀에 사는 코디 솔로몬과 로버트 솔로몬은 최근 아이폰4S용 기계식 자판을 만들겠다며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 프로젝트를 올렸다. 프로젝트는 한 달 만에 목표한 7만5000달러를 넘는 펀딩을 끌어냈다. 이 자금으로 생산에 들어가 3개월 안에 제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들은 “2년 이상 스마트폰용 기계식 자판 개발에 힘을 쏟았지만 생산 자금 마련은 별개였다”며 “작은 기업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해 주는 커뮤니티의 힘을 믿는다”고 밝혔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요즘 킥스타터에서 주목받고 투자금을 모아 실제로 생산에 들어가는 기발한 프로젝트가 연일 화제다. 안드로이드 기반 초저가 가정용 게임기를 만들겠다는 `오우야` 프로젝트도 한 달 만에 후원자 6만3000명으로부터 860만달러를 조달했다. 당초 목표인 95만달러를 훌쩍 넘었다.

X박스나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고성능 게임기가 이미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런 저가 게임 콘솔을 만들 회사는 없다. 하지만 게임기기를 마음대로 수정하고 변경할 수 있는 자유롭고 저렴한 게임 플랫폼 수요는 있었다. 흩어져 있던 이런 소비자를 직접 공략하는 크라우드펀딩 덕분에 오우야는 빛을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오우야가 화제가 되면서 전용 게임을 만들겠다는 개발자도 줄을 잇고 있다. 크라우드펀딩이 대기업 영향에서 벗어난 `인디 플랫폼` 탄생으로 이어진 셈이다.

크라우드펀딩은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과 소비자를 인터넷으로 직접 이어줘 아이디어를 사업화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킥스타터 등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희망 투자 금액과 함께 프로젝트를 올리면 이에 관심 있는 사람이 소액을 투자한다. 투자 규모에 따라 투자자에게 다른 혜택을 줄 수도 있다. 투자가 미리 설정한 목표에 미치지 못하면 프로젝트는 취소되고 투자자는 투자한 금액을 돌려받는다.

일반 기업에서 상용화하기에는 지나치게 틈새에 해당하는 상품이나 특정 분야 열혈 애호인이나 좋아할 만한 상품 등 기존 시장에서 제대로 소화할 수 없던 아이디어가 크라우드펀딩으로 새 활로를 찾고 있다. 예전 같으면 `기크(괴짜·일반인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 상상으로 그쳤을 일들이 지금은 비즈니스로 발전할 수 있다.

벤처투자사나 은행 등에 집중돼 있던 펀딩 기능을 일반 대중과 벤처 기업인에 돌려준 `투자의 민주화`를 불러왔다. 아직 콘서트나 공연 등 문화 행사 관련 프로젝트가 주류를 이루지만 점차 게임 개발, 아이디어 상품 제작 등으로 영역이 넓어졌다. 현재 킥스타터에는 한국 음식을 소개하는 영문 만화 프로젝트도 올라와 눈길을 끈다.

킥스타터를 비롯해 인디고고와 고펀드미 등 크라우드펀딩 사이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굿펀딩·펀듀·텀블벅 등 다양한 크라우드펀딩 서비스가 등장했다. 아직은 투자자에게 돌려줄 수 있는 혜택은 적다. 제품이 나왔을 때 싸게 혹은 무료로 구입할 수 있게 하거나 기념품을 보내는 정도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선 크라우드펀딩으로 지분 투자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기업은 대중을 상대로 100만달러까지 투자를 유치하고 개인은 기업 지분의 5%까지 보유할 수 있게 됐다. 내년 이 법이 시행되면 크라우드펀딩은 다시 한 번 날개를 달 전망이다. 우리나라 역시 비슷한 내용의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크라우드펀딩은 다시 다양한 `제조업 벤처`로 이어진다. 싼 가격에 생산을 가능하게 해 주는 중국의 수많은 생산 라인, 시제품 생산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는 3D프린터 보급 등은 `제조업 진입`의 장벽을 허물었다. 다양한 공작 기계와 생산 설비와 작업 공간을 제공해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만들 수 있는 `테크숍` 확산도 제조업 벤처에 힘을 실어준다.

3D프린터를 쓰면 시제품 제작 비용이 비용이 기존 2000만달러 수준에서 50만달러 정도로 낮출 수 있다. 테크숍에 들어가 제품을 생산하거나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 중국 등 아시아 지역 적당한 제조 업체를 찾는다. 온라인 주문 판매로 재고를 줄일 수 있다. 설비 투자 부담을 최소화하며 틈새 시장을 파고드는 `제조의 민주화`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오픈크리에이터 등 초저가 3D 프린터 관련 스타트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제품 개발을 위한 투자 유치부터 생산과 유통까지 전 과정에서 사업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난다. 생산과 유통의 장벽을 낮춰 누구나 아이디어와 기술이 있으면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생활수준 향상과 IT의 발달로 등장한 얼리 어답터`도 이런 벤처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눈이 번쩍 뜨이는 신기한 제품에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다.

소비자는 자신의 필요에 꼭 맞는 제품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량 생산된 제품의 소비자가 아니라 맞춤형 서비스를 받는 고객이 되는 것이다. 아직 한계는 있다. 실제 투자라기보다는 후원에 가깝다.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문화 공연 등 재미 요소가 있거나 모두 공감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프로젝트가 주로 주목받을 가능성이 크다. 자금 지원을 받은 후 약속한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 하는 사례도 있다.

신동욱 굿펀딩 대표는 “크라우드펀딩에선 자금을 후원한 사람이 바로 고객이기 때문에 마케팅과 금융 시장이 합쳐진다”며 “중개인 없이 투자나 후원이 가능해 다양하고 개성있는 벤처가 커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세희기자 hah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