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도 연구개발활동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연구개발투자액은 약 450억달러로 세계 6위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4.03%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권으로 나타났다. 최근 경제위기로 많은 나라에서 연구개발 활동이 위축되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연구현장 분위기는 밝지만은 않다. 정부출연연구기관에는 비정규직 연구원이 많아 안정적인 연구 활동에 지장을 받고 있고, 우수한 대학(원)생의 이공계 진학률도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 연구과제는 많아졌지만 그 성과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논문 편수나 특허 건수 등 양적인 성과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지만, 논문 피인용 횟수나 특허 상용화 등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선진국보다 많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투자는 선진국 수준으로 따라갔는데 성과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한국 연구지원 시스템이 아직도 구시대 틀을 벗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는 과거 선진국을 따라가는 이른바 `추격형(catch-up)` 전략을 써서 크게 성공했다. 국가 연구개발 시스템도 이 전략에 맞도록 설계됐다. 연구개발은 선진국 최신 기술을 보며 벤치마킹했고, 과제 관리는 마치 생산공정처럼 일정표를 짜고 그에 맞추는 형태로 진행됐다. 연구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과제를 중단하고 연구비를 회수하는 등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러한 `추격형` 연구개발을 벗어나 남보다 앞서가는 `선도형(leading)` 연구개발을 해야 한다. 과거 `추격형` 연구개발 시스템이 아직 남아 있어 이것이 우리의 창의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실패에 처벌이 가혹하기 때문에 연구목표를 설정할 때부터 모험적이고 획기적인 기술보다는 달성 가능한 평범한 기술을 고르기 일쑤다. 따라서 기술개발에 성공하더라도 커다란 영향력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기초연구도 논문 편수로 연구 성과를 평가하기 때문에 연구자는 도전적이고 장기적인 주제보다 논문이 나오기 쉬운 주제를 선택한다. 당연히 피인용 횟수가 적은 평범한 논문만 양산되고 있다.
먼저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연구지원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시급하다. 연구지원 시스템 혁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연구자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연구자가 창의성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려면 연구과제 선정, 과제 관리, 성과 평가 등 전 주기에 걸쳐 연구자를 믿고 연구자 자율성을 신장해야 한다. 물론 국민 세금을 쓰는 국가연구개발사업에서 국가의 평가와 감독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연구자 창의성을 옥죄는 수준이 돼서는 안 된다.
둘째, 연구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 연구개발의 세계적 추세는 오픈 이노베이션이다. 첨단 기술은 이미 너무 복잡다단해져서 한 사람의 전문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따라서 학문 영역을 뛰어넘고 연구실, 연구기관의 벽을 넘는 개방형 연구체제를 갖춰야 한다.
이제 우리 연구개발 수준도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연구개발 투자 확대와 더불어 연구지원 시스템 선진화는 필수다. 연구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율성, 개방성을 극대화하는 연구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야 연구개발 투자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더 나아가 명실상부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sjoh@ibs.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