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는 6900여개 언어가 있다. 이 가운데 글자가 있는 언어는 300여개뿐이다. 또 그 300여개 가운데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가 분명한 글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이 유일하다. 우리가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이유다.
제프리 샘슨 영국 리스대학 교수는 한글을 두고 “인류가 축적한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라 했다. 현대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신화라 불리는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깨치는 데 하루면 족할 만큼 한글은 과학적이고 의사소통에 편리한 글자”라 소개한다. 게리 레드야드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한글이 세계 문자 역사상 글자 모양과 기능을 연결한 유일한 글자이며, 이런 노력은 `언어학적 호사`”라며 찬사를 보낸다. 우리나라 문맹률이 세계 최저 수준인 것도 세계 언어학자가 극찬하는 한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한글과 우리말이 오늘날 수난을 겪고 있다. 우리글과 우리말을 탄압하려는 외세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 스스로가 그리한다는 점에서 더 마음이 아프다. 1991년 정부는 `공휴일이 많으면 산업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논리로 법정공휴일이던 한글날을 단순 기념일로 격하했다. 15년 만인 2006년 국민적 반발에 못 이겨 국경일로 승격했다. 그러면서도 공휴일에선 여전히 빼놓았다.
한글날의 공휴일 여부는 국민의식에 큰 영향을 끼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올해 4월 19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글날에 대해 물었다. 응답자의 36%는 한글날이 언제인지 몰랐다. 2년 전 조사 때보다 24.1%포인트가 늘었다. 2006년 한 금융회사가 초등학생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도 다섯 명 중 한 명이 `모른다`고 답했다. 그 후로 6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10월 9일의 의미를 모르는 초등학생 숫자도 더 늘었을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경제논리로 한글날 공휴일 지정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는 동안 젊은이들 머릿속에서 한글날은 지워지고 있다.
얼마 전 공영방송사 KBS의 드라마 제목 `차칸남자`가 문제됐다. 한글파괴냐 창작의 자유냐가 쟁점이다. 결국 한글단체의 강력한 반발로 제목은 `착한남자`로 바뀌었지만 KBS는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하다. 공교롭게도 KBS는 국가공인자격 한국어능력시험(TOPIK)을 만들어 세계인을 대상으로 평가하는 기관이다. 지난해에도 이 시험은 47개국 163개 지역에서 내외국인 45만명이 응시했다. 바른 한글을 쓰자며 시험까지 만든 공영방송사가 한글파괴를 창작이라 우길 정도니 도가 넘어도 한참 넘었다. `꺾다` `깎다` `떴다`는 방송 자막에서 `꺽다` `깍다` `떳다`가 된지 오래다. 외계어, 비속어로 이뤄진 신조어가 생기는 속도는 너무나 빨라 이젠 따라잡기도 벅차다.
지하도를 걷다보면 눈의 띄는 광고판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책에 다음의 문구가 들어 있다. “쌤, 안냐세여? 꾸벅~m(-..-)m m(_ _)m, 철수! 하이룽~ (*^^*), 영희야 방가 방가 (^..^)//” 우리가 어릴 적 배운 교과서 내용이 그렇지 않은데 왜 우리는 이런 문장을 만들어 쓸까. 아름다운 우리말이 상처받고 있다. 올바른 언어생활로 우리말을 지키자는 등의 내용이다. 대한민국 공익광고대상 수상작을 공익광고협의회가 광고판으로 만들었다. 바꾸긴 바꿔야 할텐데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참으로 난감해 가슴 답답하다. 세종대왕은 백성의 격차를 해소하고자 한글을 창제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릇된 조어와 언어습관으로 또 다른 격차를 만들고 있으니 그 분 볼 낯이 없다.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