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과기인의 삶과 꿈]이정오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대전 연구단지에 위치한 한국화학연구원 정보전자소재 연구센터에서 나노탄소(탄소 나노튜브, 그래핀) 소자 연구를 수행 중이다. 화학연구원은 우리나라 최대 화학 전문 연구기관. 전자소재·화학공정·신약개발까지 화학 전반에 걸친 연구를 수행한다. 연구 분야가 방대해 화학자뿐 아니라 생물학·약학·재료공학이나 나처럼 물리학 전공자도 연구원으로 있다.

[여성 과기인의 삶과 꿈]이정오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늦은 나이에 학위를 마치고 네덜란드로 박사후 연구원을 떠나게 된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다. 논문 주제는 탄소 나노튜브에서 전자 수송현상 및 응용이었다. 학위를 받던 해 아이는 유치원에, 남편은 이미 자리를 잡아 외국에서 장기간 체류는 생각조차 힘들었다. 그 해 독일로 학회를 떠나면서 농담 삼아 “이 분야 최고 그룹인 데커 그룹에서 채용 제의를 받으면 보내 줄거지”라고 남편에게 물었다.

역시 농담 삼아 흔쾌히 허락했던 남편에게 진짜로 데커 그룹에서 일자리 제안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는 기분은 착잡했다. 데리고 가기에도 두고 가기에도 너무 어린 아이와 가족과 떨어져야하는 2년을 내가 정말로 잘 견뎌낼지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가족은 나 자신보다도 더 나를 믿고 2년의 긴 시간을 혼자 네덜란드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네덜란드 연구원 시절, 분자소자와 탄소 나노튜브 기반의 센서를 연구했다. 나노 크기의 전극 사이에 단백질(ferritin)을 결합시켜 단백질 트랜지스터를 만들고 비교적 좋은 결과를 얻었다. 우리 그룹에선 이 결과를 네이처에 보냈다. 좀 더 좋은 이미지를 얻으려고 분석을 보냈던 TEL 분석 전자현미경 그룹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가 도착했다. 전극 사이에는 단백질 이외에 일반 전자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작은 금 입자가 있었다. 과연 연구 결과가 단백질 때문인지 아니면 금 나노입자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미 네이처에 보낼 논문을 모두 완성한 상태라 수백 번을 갈등하고 고민했다. 당시엔 전자현미경 사진만 무시한다면 문제없이 누구나 원하는 네이처 논문을 만들 수 있었다. 고민 끝에 사진을 씨이즈 데커 교수에게 보여드렸고 함께 논의했다. 결론은 논문 포기였다. 몹시도 속상하고 가슴 아팠다.

내 이력에서 네이처 논문은 사라졌다. 그 뒤 실험하고 분석할 때 좀 더 까다롭게 구는 `좋은` 버릇이 생겼다. 만일 전자현미경 사진을 무시하고 논문을 출판했더라면 어땠을까. 지난 경험을 통해 미래 여성과학자를 꿈꾸는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것이다. 연구는 너무나 정직해서 노력한 그 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가 되자는 것이다.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논문을 생각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니 말이다.

이정오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 jolee@kric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