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총살대에 서본 적 있습니까

[ET칼럼]총살대에 서본 적 있습니까

경기가 위축되니 여기저기 들리는 것은 한숨 섞인 소리뿐이다. 그나마 스마트폰 관련 시장은 나은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 수요마저 꺾이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

얼마 전 만난 한 중소기업 대표는 대뜸 “여러분 가운데 총살대에 선 적 있는 분 계십니까”라고 묻더니 말을 이어갔다. “전 있습니다. 총살대에 묶여 있는데 저쪽에서부터 `빵!` 하는 총소리가 날 때마다 한 명씩 죽어나가는 광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총소리는 제 앞에서 멈춰 저는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듭디다.”

그는 자사가 몇 년 전 한 대기업에 지식관리시스템(KMS)을 공급하며 협력사가 됐는데 하마터면 고객을 잃을 뻔했다는 것이다. 이 대기업이 글로벌 인터넷기업과 손을 잡고 미래경영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데 이 인터넷기업의 기술을 접목하면서다. 이 인터넷기업이 구현할 수 있는 솔루션을 공급해온 기업은 협력사에서 예외 없이 제외됐다.

이 대기업은 새 경영시스템에 글로벌 인터넷기업이 보유한 3차원 지도 기술, 검색엔진, 클라우드컴퓨팅, 알고리즘 분석 기술 등을 차례로 적용해 계열사 간 협력을 더욱 수월하게 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인터넷기업의 스피드·개방성·협업 문화를 도입해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전략이다. 모든 분야에 이 인터넷기업의 정보기술(IT)이 접목된다는 것은 국내 인터넷기업들이 빅데이터와 클라우드컴퓨팅 시대에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만 해도 이 대기업의 협력사가 모이는 자리에 가면 IT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제법 있었지만 올해엔 없어 어색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번엔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언제 제외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혁신 앞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좋은 관계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과감히 버려야 한다. 시장은 냉혹하다. 인간적인 판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이로운 게 아니다. 혁신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나 아니면 상대방이 감내해야 할 몫이다.

우리 IT업계는 경영이 어려워지면 정부에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했고 정부도 다양한 지원책을 폈다. 그러는 사이에 IT기업 경쟁력이 저하되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 IT업계는 그동안 정부 지원이라는 온실 속에서 자라온 화초였는지 모른다.

어느 날 정부 관계자와 업계 대표들이 만나 업계 지원 대책을 고민하는 조찬 세미나를 한다고 했을 때 출판업에 종사하는 지인이 던진 한마디가 문득 떠오른다. “출판업계는 경영이 어려워지면 문을 닫고 다시 재기하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 정부 지원은 애초에 없었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주문정 논설위원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