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서비스가 달라진다] 동남아에서 저작권 생태계 함께 만들어 가요

필리핀 마닐라 시내의 대형 쇼핑몰에 들어섰다. 우리나라의 테크노마트나 남대문 밀리오레를 합쳐 놓은 듯한 복합매장이다.

소문과 달리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파는 모습은 안 보인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매장 한쪽 신발가게 점원에게 “코리안 드라마”라고 슬쩍 묻자 상인이 슬리퍼가 잔뜩 걸린 벽을 슬며시 민다.

지난 5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한-필 저작권 교류의 밤` 행사에서 축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5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한-필 저작권 교류의 밤` 행사에서 축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벽은 사실 문이었고, 문 뒤에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담은 CD와 DVD가 잔뜩 쌓여 있었다. `해를 품은 달` 등 인기 드라마가 DVD에 담겨 팔린다. 최신 인기 드라마에서 고전(?) 드라마까지 장르도 다양하다.

한국에서도 다 챙겨보지 못하는 드라마를 여기선 모두 만나볼 수 있다. 가격은 대개 35~50페소. 우리 돈으로 1000원 안팎이다. 시내 곳곳에선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 같은 K팝 음악이 들린다. 말로만 듣던 한류 열기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곳곳에서 `강남스타일`=다른 동남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도 아직 한류 콘텐츠가 제값을 받고 유통되지 않는다. 방송사에 공급되는 한국 TV 프로그램과 가수들의 현지 콘서트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콘텐츠가 저작권 피해를 보고 있다.

한류 콘텐츠뿐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 콘솔게임 상황도 비슷하다. 최근 일부 단속이 시작되면서 공공연하게 불법 복제물을 파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문화콘텐츠 상품의 해적판을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재 필리핀의 콘텐츠 유통은 CD와 DVD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저작물 침해도 빠르게 늘고 있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주문을 받아 판매하는 정도다.

하지만 젊은층을 중심으로 스마트폰 보급률이 빠르게 높아지고, SNS 사용도 활발해 디지털콘텐츠의 성장 잠재력은 크다는 평가다. 현지 젊은이들은 “삼성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많이 하고, 페이스북 친구는 수백, 수천 명에 이른다”고 입을 모았다.

◇저작권 인식 기반 놓는다=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현지에서 강력한 저작권 정책을 펼치기보다는 시장 현황을 주시하면서 저작권 인식 제고와 한류 콘텐츠 확산을 유도하는 게 우선과제로 꼽힌다. 한국저작권위원회 마닐라사무소는 최근 필리핀의 온라인 콘텐츠 유통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현지에서 인터넷사업을 하는 전재종 제이테크놀로지 대표는 “필리핀 30여개 주요 콘텐츠사이트 등에서 한류 저작권 침해가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대부분 서버가 해외에 있어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저작권을 앞세워 현지 소비자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저작권의 경제적 효과를 인식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필리핀은 연예 및 콘텐츠산업에 강점이 있는 만큼 저작권 기반이 자리 잡으면 더 큰 수혜를 입을 수 있다는 평가다.

◇한-필 저작권 교류 다리 역할=최근 동남아시아에서 한류의 인기가 높아지고, 경제 규모가 성장하면서 한류 콘텐츠 수요가 커지고 있다. 동남아 각 나라 상황에 맞는 저작권 정책을 펴야 할 때다. 한국저작권위원회 마닐라사무소는 이런 필요에 따라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필리핀을 중심으로 점차 늘어나는 저작권 및 콘텐츠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아직 개소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한국 콘텐츠를 활용하려는 필리핀 기업이나 기관에 저작권 상담을 해주거나 필리핀과 국내 저작권단체를 연결해주며 양국 저작권 생태계를 잇는 가교 역할에 시동을 걸었다. 반대로 한류 콘텐츠를 `공공재` 정도로 생각하며 쉽게 가져다 쓰는 일부 교민 사회의 분위기도 개선이 필요하다.

마닐라사무소는 저작권제도 및 활용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영어와 국어로 발간한 것을 비롯해 한국 저작물의 온라인 유통 실태조사를 벌이는 등 한-필 저작권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을 시작했다.

김윤식 한국저작권위원회 마닐라소장은 “현지에서 저작권 인식을 높이고 저작권 보호로 경제적 효과를 볼 수 있음을 알리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며 “양국 저작권제도 발전을 위한 정보교류와 저작권 캠페인, 유관기관 협력 등을 중점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닐라(필리핀)=한세희기자 hah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