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살해된 여대생 방에 떨어진 머리카락 DNA가 그의 DNA와 일치했지만 창문에 방충망을 설치하기 위해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고 변명했다. 실제로 여대생이 살해되기 며칠 전 원룸 전체 방에 방충망이 새로 달렸다. 변호사는 머리카락 DNA 일치가 용의자의 범행을 입증할 수는 없다고 했다. 경찰은 난감했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머리와 손가락 끝에 전극을 붙였다. 눈앞에는 작은 카메라 같은 장치가 놓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심리연구실의 거짓말탐지 검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여대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청산가리 구입 방법, 살해 이유 등을 물었지만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용의자 옆에 놓인 모니터에는 변화가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던 그래프가 `아니요`라고 대답할 때마다 크게 흔들렸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할 때 심리 상태가 변한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신체 현상을 감지하는 것이 거짓말 탐지기다.
심리 상태가 변하면 무의식적으로 자율신경계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동공이 확대되거나 방광·괄약근이 수축하기도 한다. 심장이 빨리 뛰거나 침·땀 등의 분비가 활발해진다. 2년 전 국과수에서 개발한 거짓말 탐지기는 동공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다. 용의자에게 여대생 사진과 청산가리 사진을 한 장씩 보여주며 동공이 흔들리거나 확대됨을 감지했다. 의자 아래에 부착된 센서는 괄약근 수축과 확대과 같은 움직임을 감지했다. 피부 전기 반응과 심장 박동 탐지 결과, 국과수에서 내린 결론은 용의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과는 법원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김희송 국과수 심리연구실장은 “거짓말 탐지 결과를 증거로 채택하라고 하지 않는다”며 “수사 목적으로 단서 제공 수준의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심문 도중 불안감 등으로 발생하는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거짓말 탐지기를 100%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99% 믿을 수 있다 하더라도 1% 가능성으로 범행을 입증하는 증거로는 쓸 수 없다는 의미다.
경찰은 원룸 인근 CCTV 영상을 국과수에 넘겼다. 혹시 모를 용의자의 이동 경로 등을 파악해보자는 것이다. CCTV 영상은 화질이 좋지 않다. 뿌옇거나 어두워 인물이나 물체를 뚜렷하게 식별하기 어렵다. 이 영상을 최대한 선명하게 만드는 작업은 국과수 문서영상과 영상분석실에서 진행한다.
영상 복원은 이미지 레스터레이션(restoration), 이미지 오토포커스(Auto Focus), 이미지 슈퍼 레졸루션(Super Resolution) 등 3가지 기법으로 영상 처리 프로그램을 구현한다. 레스터레이션과 오토포커스는 색·해상도·초점이 맞지 않아 뿌옇게 보이는 영상을 선명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원본 이미지에 뿌옇게 만드는 요소가 더해지는 과정을 함수로 만든다. 찾아낸 함수 값을 역으로 계산해 초점이 맞지 않고 노이즈가 생기기 이전 실제 영상과 유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슈퍼 레졸루션은 여러 장 이미지를 겹쳐 원래 이미지에 대한 정보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처음에 찍은 이미지와 그 다음에 찍은 이미지를 똑같이 중첩시켜 원본에 맞춰 나가는 것이다. 이정수 국과수 문서영상과 연구사는 “카메라를 찍을 때 노출을 오랫동안하면 밤에도 그나마 뚜렷한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원리와 같다”며 “오랜 시간동안 들어온(많은) 이미지 정보로 원래 영상으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CCTV 위치와 렌즈 때문에 왜곡된 영상도 복원해 인물의 키와 체격도 파악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 보듯 원본 이미지에 가까운 선명한 영상은 얻기 어렵다. CCTV 카메라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자동차 번호판 숫자나 사람의 얼굴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
영상분석실 복원 결과 몇몇 CCTV에서 용의자와 피해자가 같은 차에 타고 내리는 장면이 잡혔다. 함께 있는 모습은 여러 군데서 확인됐다. 번호판은 용의자 차량과 동일했다. 경찰은 둘의 관계가 단순히 임대인·임차인 관계가 아니라고 의심했다. 심문 과정에서 용의자는 여대생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용의자가 PC방을 종종 들른다는 주민의 제보가 있었다. 경찰은 해당 PC방에서 사용한 컴퓨터를 탐색했다. 용의자가 사용하는 동일한 아이디로 로그인된 몇몇 인터넷 카페에 청산가리 구매를 원한다는 게시글이 발견됐다. 댓글 중 하나에 연락처가 적혀져있었다. 용의자 휴대폰에도 저장된 전화번호다. 연락처의 주인은 작은 화공업체 대표였다. 청산가리 구입 경로가 밝혀진 후 용의자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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