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19>김영삼과 정보통신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노래할 날이 왔다. 서울 북악산에서 부는 겨울 바람이 허허로움을 더 느끼게 했던 1998년 2월 24일. 국민이 맡겼던 대통령 권한을 반납할 시간이었다. 통치권자의 5년은 결단의 나날이었다. 영광은 짧고 고뇌는 길었다.

“자 이제 떠납시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오후 5시 5분 부인 손명순 여사와 청와대 본관을 나섰다. 본관 앞에 도열한 직원들과 일일이 이별의 악수를 나눈 김 대통령 내외는 서울 상도동 사저로 가기 위해 승용차에 올랐다. 이별 앞에 일부 직원은 눈물을 보였다.

영욕으로 점철된 청와대를 떠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김 대통령은 만감이 교차했다.

사저에 도착하자 400여명의 주민이 몰려 김 대통령 내외를 환영했다. 김 대통령은 승용차에서 내려 주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26세에 국회의원이 된 이래 45년 동안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이제 상도동 주민 여러분과 저는 5년 만에 다시 한식구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만납시다.”

김 대통령은 사저에 도착, 1층 거실에서 기자들에게 임기를 마친 소감을 짤막하게 밝혔다.

“멀고 험한 항해에서 돌아와 고향의 품에 안긴 느낌입니다. 우선 푹 쉬고 싶습니다. 환영해준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김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날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김 대통령은 오전 국무회의 주재와 국립묘지 참배, 수석비서관 오찬, 은행법개정안 등 3개 법안에 서명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에 걸려 있는 역대 대통령 초상화 옆에 자신의 초상화가 걸리는 것을 지켜봤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 대통령 순으로 사진이 걸렸다. 김 대통령의 초상화는 이원희 계명대 교수가 그렸다.

세상은 변하는 것, 세월 앞에 영원한 것은 없었다. 김 대통령의 멀고 험난했던 청와대 5년 임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권력자가 떠난 자리에는 공과(功過)만 남았다. 피할 수 없는 역사의 냉엄한 평가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보통신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이 `ICT강국`을 향해 본격 시동을 건 것은 김영삼정부 시절이다.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한 것이 시발점이다. ICT가 한국의 대표 브랜드로 등장하는 기반을 그가 만들었다.

김 대통령은 `정보화를 국정지표`로 제시한 첫 대통령이었다. 전임 대통령들도 과학기술이나 정보통신에 역점을 두었으나 정보화를 국정지표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김 대통령은 재임 중 “정보화는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이라면서 `정보화 대통령`이 되고자 노력했다.

이각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현 KAIST 교수, 한국미래연구원장)의 증언.

“국정지표로 정보화를 제시한 대통령은 김 대통령이 처음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문민정부가 내건 신한국 창조의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 정보화라고 확신했고 그런 신념에서 국가 정보화를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문민정부 5년의 정보통신 업적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정보통신부 발족이다.

1994년 12월 3일.

김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세계화 추진 당정 고위회의를 주재하면서 사상 최대 폭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했다.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고 정보화 관련 업무를 정통부로 이관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후 정통부는 외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김 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나는 정보화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1994년 12월 정부조직 개편을 단행하면서 체신부를 개편, 정보통신부를 발족시켰다. 그때까지 상공자원부, 과학기술처, 공보처 등에 흩어져 있던 정보화 관련 기능을 정보통신부로 일원화해 정보화사업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정통부 출범의 산파역은 윤동윤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 정우회 회장)이다. 윤 장관은 정보통신에 확고한 신념과 해박한 지식,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체신부 숙원이던 정통부 출범을 성사시켰다. 그 과정에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국회의장 역임. 현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과 박동서 행정쇄신위원장(작고) 등이 정통부 출범을 적극 지원했다.

윤동윤 전 장관의 말.

“정통부 출범은 체신부의 오랜 숙원이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일이 아닙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미래를 내다보며 노력한 결과가 문민정부 들어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론 확산과 논리 개발을 위해 수년 동안 체신부는 다양한 활동을 했어요.”

정통부 출범의 숨은 공로자인 박관용 비서실장은 무산될 위기에 놓인 행정쇄신위 정부조직 개편안을 넘겨받아 극비에 작업을 해 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냈다.

박관용 전 비서실장의 증언.

“1960~1970년대 개발시대의 정부조직은 개방화와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서실장 직속으로 실무팀을 만들어 극비리에 개편안 작업을 했어요.”

이 작업에 관여했던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14대 국회의원. 현 한국디지털고등학교장)의 말.

“김 대통령은 정치는 9단이었지만 정보통신 분야는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해 오늘날 ICT 강국의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1994년 3월 23일.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이날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종합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이 종합계획은 `1초 생활권 구현`을 위한 청사진이었다. 모두 44조7777억원을 투입하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국가정보화 프로젝트였다. 정부는 7월 11일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기획단장에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을 임명했다. 기획단은 8월 17일 현판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김 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한국경제의 새로운 활로는 정보화혁명에 달려 있었다. 나는 이를 위해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을 국책사업으로 서둘렀다.”

경상현 초대 정통부 장관(현 KAIST 겸직교수) 시절인 1995년 8월 14일.

정통부는 정보화 강국을 위한 법·제도적 뒷받침을 위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6장 36조 및 부칙으로 구성했다. 국가정보화 촉진과 기반 조성, 정보통신 고도화를 위한 법적 근거가 되는 법이었다. 이 법에 근거해 정보화촉진 및 통신산업 진흥정책을 심의할 기구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화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기본법 제정 작업은 정홍식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이 총괄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 법 제정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했다.

“나는 이 법에 근거해 1996년 4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종합적인 정보화시책을 추진토록 했다. 위원은 각 부처 장관과 국회 사무총장, 법원 행정처장 등 25명 이내로 구성키로 했다.”

이석채 정통부 장관(현 KT 회장) 시절인 1996년 5월 14일.

김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1급 정보통신 비서관을 신설했다.

청와대는 “김 대통령이 정보화를 직접 챙기겠다는 조치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초대 비서관에는 강상훈 정통부 정보통신정책국장(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이 임명됐다.

1996년 6월 11일 열린 제1차 정보화추진위원회에서 정통부는 정보화추진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10년까지 5년마다 3단계로 나눠 국가정보화를 실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부처별로 흩어져 있는 정보화추진체계도 정통부로 일원화했다.

1996년 6월 18일.

김 대통령은 부처 직제를 개편하면서 정통부에 국가정보화 추진과 초고속정보통신 기반 구축을 담당할 기구로 1급이 실장인 정보화기획실을 설치했다. 이런 조치는 김 대통령의 확고한 정보화 실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석채 장관의 강력한 추진력과 이계철 차관(현 방송통신위원장), 박성득 기획관리실장, 정홍식 정보통신정책실장 등이 백방으로 뛰었다. 특히 박 실장은 총무처 조직국장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이 일을 성사시켰다. 초대 기획실장에는 안병엽 재정경제원 국민생활국장(정통부 장관. 17대 국회의원 역임. 현 KAIST 석좌교수)이 임명됐다.

강봉균 정통부 장관(재정경제부 장관, 16·17·18대 국회의원 역임, 현 건전재정포럼 대표) 시절인 1996년 10월 14일.

김 대통령은 오전 청와대에서 정보화추진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정보화전략을 발표했다.

이날 회의는 사상 처음으로 서류와 펜이 없이 컴퓨터를 이용한 영상회의로 진행했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보화는 이제 우리 모두의 과제이자 기회”라며 정보화 추진 5대 원칙과 6대 중점과제가 담긴 정보화 전략을 선언했다.

1996년 12월 6일.

정통부는 정보통신산업 발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은 ICT 강국 발전의 총괄 지침서였다. 이 대책에는 경상현. 이석채. 강봉균 장관의 미래상이 녹아 있는 용광로 대책이었다. 3년여에 걸친 작업은 정홍식 실장이 총괄했다.

김 대통령은 재임 중 `선(先)국내경쟁 후(後)국제경쟁`이라는 통신정책에 따라 이동전화와 시외전화 국제전화에 경쟁을 도입했다.

김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은 해당 부처 장관에게 재량권을 주는 권한위임형이었다. 큰 방향만 맞으면 장관들이 소신껏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문민정부가 추진한 각종 정보통신정책은 당시는 미래상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됐다. 생각을 현실로 만든 게 바로 정보화의 힘이었다.

김 대통령은 퇴임 후 정보화 추진에 대해 이렇게 자평했다.

“나는 정보화를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로 자리매김해 추진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정보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는 정부와 민간 모두가 합심해 노력한 결과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