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기통신연합(ITU) 인터넷 결의에 한국이 서명한 것은 인터넷 통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인터넷 정책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는 주장이 나왔다. 권위주의·후진국 정부의 인터넷·시민사회 통제 야욕에 한국이 동참했다는 비판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 시민사회 대표격으로 참여한 박윤정 한국뉴욕주립대 교수는 최근 기자와 만나 “최근 반대 여론은 인터넷 거버넌스 패권을 고수하려는 미국의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아이칸)을 사실상 관리하는 미국의 `독점`에 대항해 `다양한 국가 참여`에 표를 던진,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의견이다.
◇`개방 VS 통제`가 아닌 `미국 VS UN`
문제가 된 조항은 국제전기통신규칙(ITRs) 본문과는 별도로 발의된 `인터넷 성장 가능 환경조성 노력` 결의문이다. ITU의 인터넷 발전에 대한 역할을 담은 상당히 선언적 내용이지만 미국을 위시한 일부 국가는 강하게 반대하며 이 조항을 문제삼아 ITRs 개정안 전체에 서명을 거부했다. ITU에서 인터넷 의제를 다룰 것을 강하게 주장한 중국·러시아와 한국을 포함한 89개국은 찬성했다.
박 교수는 이를 인터넷 개방과 통제의 대립이 아닌 미국 주도의 인터넷 거버넌스와 국제기구 주도의 거버넌스 간 대립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현재 인터넷 주소체계 관리권을 쥐고 있는 아이칸은 표면적으로 국제 민간기구지만 사실은 미국 상무부가 단독으로 관리하는 유관 비영리법인일 뿐”이라며 “아이칸의 독점을 막고 1국 1표 구조인 국제기구로 옮겨오자는 주장은 매우 합당하다”고 설명했다.
중국이나 이란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가 `반 아이칸`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자국 인터넷 통제와는 전혀 다른 국제 정치적 이슈가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박 교수는 “미국이 단독으로 관리하는 인터넷 거버넌스는 중국 같은 경쟁국이나 이란 등 반미 국가에는 엄청난 위협일 수밖에 없다”며 “예를 들어 아이칸이 우리나라를 통제하기 위해 닷케이알(.kr) 도메인을 일방적으로 없애버린다면 속수무책으로 사회·경제 시스템이 무너지게 되는, 핵폭탄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미국과 반미 국가의 이러한 정치적 대립을 방증하는 예가 이번 회의에서 중국이 주장한 `인터넷 접속권은 인권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을 미국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ITRs 서문에 인권 관련 문구를 포함하자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킨 미국이 외려 인권 차원의 인터넷 접속권 보장 주장에 대해선 반대한 것은 `접속권에 대한 통제권`을 고수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한국은 이 표결에선 기권했다.
◇한국, 미·중 양강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 고민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수잔 크로포드 전 미 백악관 기술 특보(하버드대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미국은 인터넷 결정 권한이 정부에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 한다”며 “WCIT-12의 인터넷 거버넌스 합의는 `밀실`에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이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밀실회의는 있을 수도 없는 구조며, 자국 통제 아래 있는 아이칸을 순수 민간 단체로 기본 패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가 이를 인지한 상태에서 `인터넷 결의`에는 서명하고 `기본 인권으로서의 접속권` 투표에서는 기권한 것은 전통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와 동북아 정세에 따른 중국 외교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방송통신위원회의 공식 입장은 “인터넷 이슈가 ITU 뿐만 아니라 OECD, 사이버스페이스 총회, 아이칸 등 가능한 모든 국제기구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칸 VS IGF·ITU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