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은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에 대패했다. 국민은 절망에 빠졌다. 정신은 피폐해졌고, 고난을 극복할 한줄기 희망도 보이질 않았다. 암울한 이 시기 독일 국민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자부심, 가능성을 심어준 사람이 철학자 피히테다.
적군 점령 하에 있는 베를린학사원 강당에선 그의 용기 있는 강연이 진행됐다. 1807년 12월부터 매주 일요일 14차례에 걸친 강연 내용이 오늘날 교양필독서로 전해지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다.
이 연설문 작성에 영감을 준 것은 서기 98년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다. 피히테를 거쳐 훗날 히틀러에 이르러서는 독일민족 우월주의만을 부각한 나치즘으로 오역되긴 했지만 `게르마니아`는 암흑시대 민족의 결집과 대통합을 유도하는 뿌리정신으로 작용했다.
피히테는 패전 후 만연한 패배심, 이기심, 나태함을 지적했다. 해결책으로 게르만족의 우월성과 국가 재건에 필요한 새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청년, 노인, 실무자, 사상가, 학자, 문필가, 영주 등에게 간청했다. 그들에게 긍정적인 변화와 각자의 소임완성, 분열을 극복한 대통합을 주문했다.
그의 강연은 게르만족의 순혈성과 강인함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좌절을 딛고 일어설 분기(奮起)의 원동력이 됐다. 1815년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을 결성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하고, 1871년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파리를 함락시킨 배경에는 피히테가 강조한 독일정신이 작용했다. 20세기 독일이 이뤄낸 라인강의 기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각계의 주문이 쏟아진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 아닌 당선인에게 고함이다. 대선 공약으로 내건 미래창조과학부 신설이나 중소중견기업육성, 경제민주화, 일자리 창출, 정치혁신, 국민 대통합 등을 조속히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주문한다. 약속을 지키라는 당연한 요구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이 완료됐다. 그림 그리기에 빗댄다면 당선인의 대선공약은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구상하고 구도정도만 잡아놓은 초안이다. 인수위원회가 해야 할 일은 그 구상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연필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일 것이다. 당선인에게 표를 준 51.6%의 투표자를 만족시키고, 당선인을 반대한 48.4%의 투표자까지도 설득할 수 있는 훌륭한 밑그림을 그리는 게 인수위원회의 역할이다.
대통령 선거 다음날 인터넷에는 이런 사진이 올라왔다. EBS 방송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다. “인도 마하트마 간디 추모공원에는 간디가 말한 `7가지 악덕(惡德)`이 있다.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富)`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 반세기 훨씬 전 간디의 철학이지만 지금도 유효하다. 계명(誡命)과 다름 없다.
이 사진 다음에는 후보시절 당선인이 전국에 공약으로 내걸었던 수십 장의 현수막 사진이 빼곡히 첨부됐다. 현수막 내용은 이렇다. 대학등록금 부담 절반으로, 고교 무상의무교육 시대, 맞춤형 보육서비스, 취업스팩 타파, 어르신 틀니·임플란트도 건강보험으로, 신용유의자 부채 50~70% 감면, 카드·백화점·은행 수수료 인하, 민주당이 올린 등록금 새누리당이 반으로 내립니다, 비정규직도 차별 없이, 동네상권에 대형마트 진입규제, 중소기업 주요업종 대기업 진출 규제, 중소기업·개인사업자 연대보증 폐지.
그리고 현수막 사진에 이어 마지막에 덧붙여진 한 줄의 글. “이젠 우리가 지켜볼 때입니다.” 지켜볼 눈이 많다. 이들을 만족시키고 대통합의 길로 유도하는 게 바로 당선인과 인수위원회가 이뤄내야 할 사명이다.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